[사례] 언론의 선정적 시각이 어떻게 사실을 달리 보이게 하는가?!

언론이 사회현상을 선정적으로 다루어 “잘못된 생각의 틀”을 씌워버리는 전형적인 사례!

아동학대는 ‘계모’가 하는 게 아니라 친부모가 일으키는 경우가 훨씬 많다.

2014년 3월 16일 일요일, 한국의 풍경
허핑턴포스트코리아 , huffingtonpost.kr

광화문 세종대로에서는 보행전용거리 행사가 열렸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인 대회가 있었고, 명동에서는 정몽준 의원이 시민들과 만났다. 여의도에서는 김황식 전 총리가 서울시장 출마 선언을, 제주도에서는 원희룡 전 의원이 제주도지사 출마 선언을 했다. 날씨는 따뜻했다. 외투를 벗고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따뜻한 날씨도 추운 …

폭력에 방치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켜야야할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제 기능을 못하는 문제가 우선이다. 언론이란 이런 제도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함께 모색하도록 생각의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길을 찾도록 촉구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언론이 지적질과 선정성에 중독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깊이 병이 든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다!

[돌아보기] 어느 살인범의 인권에 대하여

살인범에게 인권이 있을까?

감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의식조차 엿보이지 않는 그의 행위에 대해 인권을 운운한다는 게 그리 적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끔직한 범죄로 못숨을 앗긴 희생자들에게 우선 조의를 표하는 것이 우선이고, 애통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살인범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의 무감각해보이기까지 하는 소름끼치는 행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의 살인행각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언론의 무책임한 취재경쟁에 대해서는 분명히 돌아보아야 할 문제가 숨어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는 얼마간의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법을 통한 심판이라는 것이 그 범죄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도 만족스럽지 못한, 즉 일반적인 ‘법 감정’을 거스르는 일들도 때때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체제의 어떤 부분들은 그럴만한 이유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온 지혜의 축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죄형범정주의(죄에 대해 그 형벌을 법으로 정하고,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는 제도)나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일사부재리의 원칙(하나의 죄에 대해 중복된 처벌을 가하지 않는 제도), 무죄추정의 원칙(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하여 피의자를 다루는 원칙) 등은 수 많은 시행착오와 역사적인 과오를 되돌아보며 만들어온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끔찍하고 일반적인 법감정에 비추어볼 때 그 어떤 배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사적인 감정으로는 그런 공분에 충분히 공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만 충실하여 우리가 세워온 사회적 약속의 원칙마저 무너뜨리게 되면, 사사로운 보복의 감정이 끝없는 복수와 멈추지 않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사회체계가 무너져내리는 재앙을 피해갈 방법이 없게 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한번의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이어나가는 생명력을 잃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제는 실천하기 참 어려운 선언이다. 그 만큼 복수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요, 해소할 길 없는 억울함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려운 인간적인 면모일 것이다. 사회체제는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고 죄의 대가에 대해 합의 된 댓가를 명문화하여 끝없는 보복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게 짜여진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속에 사회는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보편타당한 공분이 널리 공감되어 있는 마당에,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언론이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을 방패삼아 헌법에 명시된 인권에 대해 예외를 만드는데 앞장선다는 건 분명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을 훼손하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언론은 이제라도 냉정을 지켜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공공의 명제임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노출되어 겪게되는 피의자의 아들과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단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건, 그의 아들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명예와 인격이 침해당하게 되는 공공의 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법감정이라는 이유로 황색저널리즘이 마구 날뛰어서는 곤란하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이 사회에 입힐 뼈아픈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번쯤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인격장애’라는 조심스러운 비정상성의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경향이 만연되어버린다면 그 댓가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처입은 영혼을 돌보고 달래어 따듯하고 너그러운 사회의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조금이라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헤아리지 않고 ‘인격장애’라는 판정을 남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의 악순환 속에서 더더욱 강력한 ‘공공의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될 뿐이다.

법은 최소한이라고 했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눈앞에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냉철하게 사회적 약속이라는 제도의 이성을 지지하여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그가 아무리 끔찍한 살인범이라도 말이다. 언론은 더 이상 호기심과 말초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 대신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배려와 용서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하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걸음임을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

[생각] 제한적 실명인증제 그리고 디지털 문화

얼마전 OECD 장관회의 개막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인터넷의 힘은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한창 촛불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시점에서 나온 발언인지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원칙론을 이야기 한 것 처럼 보이는 이 발언의 “진의”가 그야말로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 미묘한 발언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의 몇 몇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인터넷의… 신뢰“라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 중 하나가 통칭 인터넷 실명제, 정확히는 제한적 본인 확인 제도라는 것이다. 본래의 취지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과도하게 요구되어 유출의 위험이 높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옥션의 해킹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그 결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익명성의 폭력이라고 지칭되는 무분별한 욕설, 인신공격, 악의적인 루머, 사실 왜곡 등이 인터넷 상에서 줄어들었다고 볼수 있느가? 더 근본적으로는 풍문, 루머, 악의적인 농담, 부풀려진 이야기, 근거없는 비방, 욕설 등이 인터넷 상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인가?

화장실 낙서라는 문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화장실 뒷담화는 때로는 권력자에 대한 비아냥도 있고, 감춰진 욕구를 마구 쏟아낸 음담패설도 있고, 근거없는 비방이나 창작에 가까운 헛소문도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화장실을 벗어나 공적인 장으로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어서,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 사람도 있었고 섬세한 감수성에 상처를 받아 적잖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소통의 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기는 하더라도, 그 이야기들은 애초에 감정적 배설을 위한 목적으로 갈겨쓴 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장실 낙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이에 대한 과민한 대응에서 시작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분기점으로 한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최근의 대응은 진지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소신에 찬 자기발언 뿐만 아니라 ‘화장실 낙서’까지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이 미디어의 제도적 기능을 훼손하고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시선 속에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저 시정잡배, 어중이떠중이의 불온한 낙서라고 단정짓고마는 생각의 편향성이 담겨있다.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인터넷의 힘에 왜 신뢰가 담보되어야 하는가?

Keumho_Construct_Advertorial인터넷 매체가 언론이라고 불리우는 기성 제도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징후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 징후들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몇 몇 ‘어르신들’께서는 이 신생 매체의 불량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그들의 눈에는 이 위험한 매체가 법도 상식도, 교양머리도 없는 언터쳐블 불량 청소년처럼 보였던가 보다. 그들은 언론의 중립성, 객관성, 공익성을 근거로 인터넷 매체에게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언론이 중립적이라고? 객관적이라고? 공익을 우선한다고? … 누군가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광고와 기사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런 기사(← 읽어봅시다)를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모든 논란의 본질은 서로의 입장과 이익을 둘러싼 대립에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를 둘러썬 새삼스러운 과민반응은 그 매체가 가리키는 어떤 지향점이, 그 발언이, 그것이 날라다주는 어떤 내용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사회적 문제를 일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상들은 그것을 낳은 일정한 구조적 힘, 집단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에 넘쳐나는 각종 불량스러운 언사들, 집단적 폭력, 삽시간에 번져버리는 놀라운 전파력의 파괴적인 힘,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얻어지는 가학적 쾌감 등등의 현상들은 한 두 가지 제도를 도입하고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개방적이고,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며, 강한 결속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집단 지성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 매체에 신뢰를 요구하기에 앞서, 신뢰라는 것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 듣기 거북하다고, 무질서해보인다고, 논리적이고 세련된 어법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입을 법규와 제도로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 셈이다. 언론의 자유는 불가침의 절대적 가치라고 동의하면서 어째서 인터넷 매체의 수 많은 목소리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것인가? 인터넷 매체에 올바른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여 자신들의 지위와 호칭을 떠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한 명의 동등한 네티즌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라! 인터넷 실명제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다. 보도자료와 기사라는 제도화 된 소통의 틀을 벗어나 인터넷 매체 안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위엄있고 멋진 당신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성숙되어가는 디지털 문화가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유명무실하고 비효율적인 제도를 대신하는 그 날을 꿈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