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디지털 스토리텔링 해부학교실을 시작하며

수 많은 아쉬움과 뜨거운 눈물을 남기고 소치 올림픽이 막을 내렸습니다. 스포츠 이벤트가 언제나 그렇듯 이번 올림픽에서도,   선수들 모두는 저 마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그들의 환희와 눈물에 함께 소리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깊은 탄식과 따듯한 위로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아쉬운 은메달과 우아하고 위엄있는 미소가 남긴 긴 여운이 한 동안 온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뜨거운 열기와 깊은 탄식이 오가던 사이로, 김연아 선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E사의 광고가 한 동안 시끄러운 입방아에 오른 일이 있었습니다. 

E1_공고_너는_김연아가_아니다_캡쳐

너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때면 흔하게 들려오는 ‘애국가’의 변주곡 같은 이 야기가, 이번에는 예상치못한 반발에 부닥치며 서둘러 막을 내려야 했던 것이죠. 심지어는 한 네티즌이 만든 패러디 영상 ‘당신은 김여아입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egZTwuio-Rw)는 광고의 메시지가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를 여실히 폭로하며 수 많은 네티즌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기에 이릅니다. 결국 해당  광고는 올림픽 참가 선수를 모델로 쓸 수 있는 값비싼 비용을 이미 치르고도 자진해서 매체에서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문제는 메시지가 아니다! 

흔히들 이 논란에서 메시지가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너’라는 호칭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에서부터, 김연아 선수의 개인적 성취를 가로채는 듯한 ‘김연아 = 대한민국’이라는 논법이 무리수라는 지적도 있고, 이런 방식의 애국심에 호소하며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는 논법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질타에 이르기까지, 그 광고 안에 담긴 메시지의 오류를 지적하는 비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메시지’에 있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광고에는,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도가 너무나 쉽게 까발려졌다(?)는 미숙함도 있지만,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이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1)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로서의 기업(혹은 브랜드)2) 그 광고 ‘메시지에 반응하는 대상으로서의 소비자’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대중매체 시대의 문법’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이 논란의 본질에 담겨있는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야기를 만드는 건 누구일까요? 

언뜻 보면 당연한 걸 묻는다 싶은 질문이지만, 디지털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과 소셜 미디어의 폭발적인 성장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변화에서 본다면, 이야기를 만드는 건 이제 소비자와 개개인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작가’, ‘방송국’, ‘광고 대행사’, ‘기자’, ‘편집자’ 같은 전문가와 시스템이 한 축에 있고, 다른 한 쪽에 아무생각없이 그 이야기를 처묵처묵하는 대중을 가정하는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 다른 한편에 놓여져버린 ‘대중’의 일원(?)으로서 너무나 기분나쁘고 모욕적인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그들은 이런 기분나쁜 감정을 손쉽게 자판에 실어 댓글을 날립니다. 비꼬고 조롱하며, 메시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리저리 비틀며 놀이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기획했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뜨거운 감정은 차가운 냉소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김연아 선수를 주인공으로 한 E사의 광고가 당한 처참한 난도질은 바로 이러한 감정 구조와 맥락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런 얼척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TV에서, 신문에서, YouTube로 옮겨온 ‘바이럴 영상’이라는 콘텐츠를 통해서도, 새로 개업한 가계의 전단지에서도, ‘블로그 마케팅’이라는 둔갑술에 몸을 감춘 광고성 리뷰들에서도… 이런 접근방식의 이야기는 하루에도 수백건씩 사무실의 어딘가를 떠돌며, ‘히딱한 것’, ‘쌈빡한 꺼리’, ‘한 방에 보내버릴 이야기’, ‘쥑이는 영상’ 등의 모습으로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독자와 소비자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는 아직도 이야기를 만들 때, 설득과 감정이입을 요구하며 대상으로서의 독자를 가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누구의 손에나 저작 도구가 쥐어져 있고,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와 소스는 어디에나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이야기이든 최종 소비자가 또 다른 창작자이자 편집자, 각색자이자 비평가인 환경 속에 던져지게 되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과 새로운 혁신이 필요합니다. 작가적 의도와 잘 짜여진 구조, 몰입과 이완의 리듬을 조율하는 장인의 솜씨, 살아있는 캐릭터와 호소력 깊은 연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잘 만들어진 극(well-made drama)’가 더 이상 상식적인 접근이 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완성도가 흥행과 고객 (혹은 독자, 관객, 청중)의 반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문법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해부학 교실”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달고 연재를 시작하는 까닭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어떤 막연한 필요 때문입니다. 기존의 모든 이야기 하기 방식(스토리텔링, 광고제작법, 드라마투르기, 프레젠테이션, 강연 등 저마다의 이름은 조금씩 다르겠지만)은 이제 ‘디지털’화 된 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의 본질을 깊숙히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통되는지, 누가 이야기의 생명력을 좌우하는지, 왜 어떤 이야기는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되살아나며 왜 어떠 이야기는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잊혀져버린 기록 속에 잠겨버리게 되는지… 이제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부치고,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 생명체’를 파헤치고, 뜯어보고, 재구성해보고, 실험해보는; 무지막지하고 무식하며, 전례도 없고 따라할 법칙도 없는, 새로운 이야기 방법을 찾기위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 ‘이야기는 어떻게 완성이 되는가?’에서는 이야기하기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조금 더 깊숙한 곳을 들춰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서운 해부학교실의 이야기는 매주 토요일에 돌아옵니다!) 

[소통과 전망] #2. 기술혁신과 일상의 변화, 그리고 브랜드와의 관계 – Leo Burnett

Leo Burnett이 지난 해 10월에 SlideShare에 공유한 “The Future of Advertising: How brands can embrace miraculous new technologies to change our daily lives“라는 자료가 새삼 눈에 들어와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Leo Burnett은 기술이 변화시키는 일상을 3가지 상황을 상상하여 우리가 경험하게 될 새로운 생활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Leo Burnett and Contagious: Wildfire / Full of Tomorrow – Scenario 1 :: Haptic Experiences

2. Leo Burnett and Contagious: Wildfire / Full of Tomorrow – Scenario 2 ::  Smart Health

3. Leo Burnett and Contagious: Wildfire / Full of Tomorrow – Scenario 3 :: Human Body as Interface


상상으로 그려진 미래의 모습은 대부분 현재의 기술에서 충분히 가능할 법한 경험들입니다만, 어떤 것들은 영화 속에서나 볼듯한 먼 미래의 일들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저 즐거운 상상으로 남겨둔다면 무언들 얘기 못할까 봅니다만, 이 영상들은 기술의 변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만들어내는 브랜드들의 ‘미래경쟁’을 엿보게 하고 있습니다.

Leo Burnett의 “미래의 광고(The Future of Advertising)”를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브랜드는 이제 ‘마케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총체적인 경험’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그 경험 과정에 참여하여 ‘고유한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방식으로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브랜드는 좀 더 “서비스 디자인(Service Design)”에 가깝게 될 것이고, 브랜드가 관여하는 접점에 해당하는 각종 기기와 센서, 디스플레이와 상호작용 체계 등은 ‘고유의 식별값(IP Address ?)’을 부여받고, 실시간으로 24시간 내내 정보와 데이터를 교환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브랜드는 “공감과 소통을 지향하는 환경(Empathetic Ecosystem)”을 창출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브랜드는 사람들과 새로운 기술 사이에서 “연결 조직(connective tissue)”이 될 수 있을까? (Can brands be the connective tissue between new technology and real people?)

기술의 변화 양상은 속도와 방향을 가늠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 도도한 변화의 줄기가 만드는 커다란 그림은 대체로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으며,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 일하는 법,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법, 사회 제도와 체계를 유지하는 법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기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만들어 낸 변화의 의미를 바르게,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웹 2.0] 영상 저작물에서 아날로그적 소재의 활용

미디어가 폭발할지경으로 늘어나면서, 그 채널을 타고 흘러다니는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UCC는 이러한 흐름 중에서도 이미 도도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변화의 중심에 속한다. 생산의 주체가 한정된 전문가 집단에서 벗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뉴스와 이야기거리,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뛰어들면서, 새로운 형식 또는 기존의 컨텐츠 생산 방식의 융합과 차용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새로움은 과감한 시도만큼이나 설득력과 매력이 높은 것들이 많아서, 오히려 기성 미디어에서 UCC 스타일의 개성을 차용하기도 한다.

팝업북 형식의 광고 CF들이 많아진 것도 최근의 흐름이다. 디지털 영상의 현란함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정체 현상을 보이면서,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날로그적인 소재인 종이, 찰흙, 천, 크레용, 블럭 같은 일상생활 속에 친숙하고 사람냄새나는 소재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영상은 복잡한 프로세스나 업무를 이해하기 쉬운 비디오 영상으로 만드는것으로 유명한 CommonCraft(http://www.commoncraft.com/)에서 제작한 영상물이다. 이들은 대체로 손으로 그린 드로잉과 가위로 오려낸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옮기거나 더하고 빼면서, 복잡한 절차와 사용법, 서비스의 개념이나 장점, 비즈니스 모델 등을 시각화하고 있다.

Goolge Reader에 대한 다음 영상물을 보자.

이 비디오는 “블로그가 어쨌다는 건가? (What’s the big deal about blog?)”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블로그의 영향력에 대해 경이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블로그가 미치는 변화와 이전 시기의 매체 환경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통찰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개념과 설득의 과정을 이들은 지극히 간단한 도표와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2분 58초짜리 짧은 영상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왠지 블로그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 설명에 동원된 개념과 데이터가 전문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을 일상어로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기법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가? (영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

아주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기업의 전자제품이나 솔루션, 프로그램, 캠페인 같은 일정한 설명과 설득의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러한 영상물들을 아주 가까이서 자주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미디어와 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사람은 더욱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사람냄새가 나는 유쾌한 컨텐츠에 끌리기 마련이지 않은가 말이다.

[생각] 아직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많이 외로우셨죠’

광우병 쇠고기 파문으로 시작된 촛불 집회는 벌써 두 달이 넘게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하무덤덤 하던 그 소식에 뭉클하고 가슴을 때리는 영상 하나가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아… 신부님, 우리 신부님…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고, 깨우침을 주고, 진실의 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분들의 목소리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글을 쓰게 하고 있다.

“시위의 원칙은 평화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하늘이 주는 평화다. 우리와 뜻이 다른 분도 있다. 그 분들이 격정적인 감정 휩싸일 때 나무라지 말고 꼭 안아 달라.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평화행진은 꺼지게 된다. 마치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이 조심조심, 어떤 아주머니가 출렁이는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것처럼 살포시 거리행진을 시작하자.” (7월 1일 김인국 신부님의 강론 중)



“전문시위꾼이 주도? 예수님은 ‘전문시위꾼’이 맞다” (7월 1일 김인국 신부님의 강론 중)

 이 영상들은 그 어떤 저널리즘 보다 강한 힘으로 나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사람들 모두의 손에 돌려진 디지털 미디어가 그 어떤 방식의 통제와 조작을 뒤엎고 “진실”을 드러내는 옳바른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도록 애써 무덤덤하려 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날에도 나는 애써 무덤덤했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저녁 총선 결과 방송을 보며 이민을 가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해보았지만, 나는 애써 입을 닫았다.

이런 후보를 우리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으로 선택하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역사의 한 사실로 기록된 어처구니 없는 선거 결과였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나는 이때 지독히 아팠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는구나… ” ,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절실한 열망이 우리의 눈과 귀를 이렇게 손쉽게 가려버리기도 하는구나” 하며, 체념을 익히기 시작했다.

일이 일인지라 이따금씩 돌아보는 동영상 사이트에서 이런 저런 영상들을 지켜보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들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뭉클하기도 했고, 기억 속에 잊혀진 줄 알았던 물대포와 체포조 헬맷을 보면서 피가 꺼꾸로 솟는 듯 했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이 모든 결과는 결국 우리 모두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던 당연한 귀결이라고, 100일만에 ‘2MB’라는 치욕적인 별명이 붙인 대통령을 결국은 우리 손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모두들 잠재적 공범이라고 그렇게 단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영상들을 보면서 비겁했던 것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애서 침묵하려 했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무리들의 저열한 비방처럼 이 영상들이 “시위꾼들의 선동”이라고 치자. 그렇게 비방하는 자들이 무엇을 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민주주의를 지켜온 진실과 진심임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미디어를 그저 “매개”라고 여기는 순진한 생각을 이젠 버려야 한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미디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읽는 자신의 태도를 담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은 오래도록 “언론”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편집당했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의 손에 쥐어진 디지털미디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스스로 볼 것을 선택하고, 그 것에 의해 세상을 읽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가르켜주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보려 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몰랐다는 변명은, 그저 보지 않으려 했거나, 눈을 감았거나, 게으름에 눈이 먼 바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손바닥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면, 이제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 진실의 뜨거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7월 5일, 나는 부끄러움을 씻고 역사의 한 자리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