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 희망은 본래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희망은 본래 거기에 있 게 아니라, 내가 찾고 자리를 잡아줘야 거기 있는거야!

스스로를 믿는 사람만이 희망을 보듬고 키운다.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는 일은 내 뜻대로 할수 없지만, 바르게 세운 뜻은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다.

희망은 본래 아득히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거라잖아?

희망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

“희망은 마치 독수리의 눈빛과 같다.

 항상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먼 곳만 바로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망이란 바로 나를 신뢰하는 것이다. 

 행운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을 따른다.

 자신감을 잊어버리지 마라.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 안상헌 저, <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pp. 88 –

[출처 : 가내훈의 가군닷컴 http://gagoon.com/xe/2264 “희망은 마치 독수리의 눈빛과 같다” 중에서]  

“저자와 독자,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 공중 매체의 키가 되는 대화(dialogue)는 모두의 발화(utterance)를 통해 완성됩니다. 완성이라는 표현이 좀 꺼림칙합니다. 공중매체에는 완성 혹은 종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흐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새로운 발화에 의해 언제든 개정될 수 있는 일시적인 정지만이 있을 뿐입니다.

SNS를 보세요. 타임라인에 한번 들어오면 어떤 발화도 무시되지 않습니다. 게시될 자리에 게시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발언도 아주 허무하게 금세 흘러가 버립니다. 또한 누군가가 올리 포스팅은 댓글과 묶이면서 하나의 메시지가 형성됩니다. …… 인터넷이 지닌 실시간 대응이라는 특성이 누구에게도 저자(author)의 특권을 부여하는 걸 거부합니다.”

– 윤영민 선생님의 <소셜미디어와 집단지성> 중, “대화 11 Marshall McLuhan과의 대화 1” 중에서

The Marshall McLuhan Center on Global Communications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다른 이야기하기의 방식과 다른지를 설명하려 할 때마다, 간명하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 곤란할 때가 많았다. 윤영민 선생님의 설명 속에서 씨앗을 하나 발견하고 품에 담는다. 그토록 찾고자 하던 알맞은 설명의 가능성을 키워볼 작정이다.

정보사회학 페이지에서는 이런 묵직한 생각들이 나눠지고 있다.

윤영민 교수님이 운영하시는 정보사회학 페이지의 노트 목록

https://www.facebook.com/infoso?sk=app_166305896747528

[말 한마디]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食爲民天)

세종대왕의 즉위교서에 담긴 말이다. 리더십의 출발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현명하고도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불안하고서는 미래의 꿈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지혜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 한 가운데에 이 말의 치열함과 정직함을 새겨넣고 일에 임하고자 한다. ‘이상주의자’라는 평을 비교적 많이 듣는 나로서는, 마땅히 경계해야 바를 일러주는 호된 채찍이 될 말이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데이비드 오길비가 말하는 창조적 리더의 조건

데이비드 오길비는 “창조적(creative)”이라는 단어를 매우 겸언쩍어했다.

“…20년 전, 창조성이란 단어가 광고 업계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당시 우리는 어떻게 일을 했을까? 지금 이 페이지를 작성하는 나 스스로도 창조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 (데이비드 오길비 지음, 강두필 옮김, 다산북스) 중, 199p)

그럼에도 ogilvy-ism이라고 소개 된 그의 생각을 담은 목록 중에는 “창조적 리더의 조건”이라는 것이 있다. 그에게도 리더의 조건을 수식하는 설득력 있는 수식어가 절실했었던가? 어쨌거나… 그냥 “리더의 조건”이라고 했을 때에 비해서, 무언가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며 과감한 시도를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그러면서도 부하들의 존경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멋진 지도자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진부한 수식어라 할지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 사용하면, 알맞은 말맛을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고 새삼 느끼게 된다.

그가 말한 “창조적 리더의 10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높은 윤리 의식
2.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
3. 스트레스와 실패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패기와 쾌활함
4. 주어진 일만 꼬박꼬박 해나가는 것 이상의 명석한 두뇌
5. 밤새도록 일할 수 있는 능력
6. 매력과 설득력을 지닌 카리스마
7. 정통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 혁신
8. 가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
9. 부하들을 열광적으로 매달리게 만드는 추진력
10. 유머 감각

몇 가지나 스스로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2번(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 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5번(밤새도록 일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제는 자신감이 없다. 2년 전만해도 5번에 과감히 Yes!라고 했을 것이다. 7번(정통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 혁신)에 대해서는 “정통”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확립된 체계’라는 것이, 우리가 일하는 세계(웹 에이전시)에 확고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모호하게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최근에 나는 9번(부하들을 열광적으로 매달리게 만드는 추진력)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들어 힘들어했다. 나머지 여섯개 정도는 잘 해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

이 모두를 갖추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때때로 이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아 본다면, 좀더 즐겁고 열정적인 일터를 일구어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지금, 나는 오길비의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의 이런 말에 용기를 얻는다. ^^

“훌륭한 크리에이터들 중 온화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심술궂은 이기주의자들이며, 일반적인 조직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대목을 읽고 나는 책의 속지에 이렇게 썼다.

“오길비의 글에서 용기를 얻다. 내가 지향하는 바를 그는 50년 전에 실천에 옮겼다. 그가 성공했듯이, 정직한 창의성으로 뜻을 이룰 것이다. (2008.07.08)”

그의 말로 나의 괴팍한 성격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죽어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는 냉철한 눈과 정확한 손을 가진 의사이지, 인간적이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의사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간적이기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서도, 일의 현장에서 너그러움은, 때로 사람들 전체를 수렁으로 빠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차갑고 정붙이기 어렵다 하더라도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하고 과감히 이끌고 가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할 뿐이다.  

오길비의 조언은 모두 하나 하나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명언이지만, 특히나 리더의 첫째 조건으로 높은 윤리의식을 꼽고, 마지막으로 유머 감각을 양념삼아 보탰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두 가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우리의 일터에서 이 두 가지 만큼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 열 가지를 두루 갖춘 창조적 리더들을 한 가득 길러내고 싶은 소망을 품어본다.

[말 한마디]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용기

넬슨 만델라 前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Time지가 밝힌 8가지 비결 중 첫 번째라고 한다. “지도자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아야 따르는 사람들도 안정을 찾고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출처 : 동아일보 http://www.donga.com/fbin/output?f=f__&n=200807120091)

나는 비교적 걱정이 많은 편이다. 세심하게 살피고 조심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몸에 베인 탓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탓에 유약하다거나, 겁이 많다거나,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인상을 주곤 했다. 나는 결코 누군가의 앞에서 사람들을 이끈다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끈다는 것이 원치 않는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때가 되면, 주어진 몫의 짐을 지어야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일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소임이 주어진다면, 마땅히 최선을 다해 지켜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이끄는 일도 찬찬히 배우고 살펴두어야 한다.

[만델라 전 대토령의 리더십 성공 비결 8가지]

1.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용기
2. 앞에서 이끌어라. 하지만 뿌리를 잊지 마라
3. 위에서 이끌어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앞에 있다고 믿게 하라
4. 적에 대해 알아야 한다.
5. 친구와 친하게 지내라. 경쟁자와는 더 친해져라
6. 외모가 중요하다. 항상 웃어라
7. 흑백논리는 없다.
8. 그만두는 것 역시 리더십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적인 자취이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고 의연하고 환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리더십의 한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 한마디] 나는 다른 사람들을 사람답게 대하는 품위 있는 매너를 갖춘 사람들을 존경한다

데이비드 오길비의 말이다.

“품위”라는 것은 매우 갖추기 어려운 손으로 만든 공예품 같은 것이다. 품위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같지만 그들 각자의 빛깔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하게 달라서 따라 하기 어렵고, 전체로서 빛을 내게 되기까지 매우 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비로소 값어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완성되기는 매우 어렵겠지만, 품위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를 묘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정직하다
– 솔직하다
– 멋을 안다
– 유머와 여유를 갖는다
– 겸손하다
– 인생을 즐긴다
– 배려한다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이 변화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매체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오래 도록 공들여 발전시켜온 말의 기술(웅변/설득/프레젠테이션/수사법/호객행위?)과 글 솜씨(문장력/카피라이팅/선동?)는 아직도 유용한 의사소통의 수단이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시각적 기호”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매체와 메시지를 다루는 비즈니스의 세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 세계에 종사하는 예민한 사람들은 난파선의 쥐떼처럼 어디론가 탈출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다. 지진처럼 예기치 못하게 그들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뒤바뀔지도 모른다고 예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재앙과 축복의 시기”에 그들은 바보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토록 X무시하던 기술자와 엔지니어들이 바꾸어놓은 세상의 규칙에 꼼짝없이 떠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생존력을 기반으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기술이 일구어놓은 네트워크의 세상에서도 가장 어렵고 섬세하고 중요한 규칙이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규칙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체를 만드는 실험을 할 생각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 어찌보면 돈 한푼 거머쥔 것 없이, 꿈과 열정만으로 그러한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역시 드높았던 자신감이 흔들리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영광을 구현했던 혁신자들의 자취를 더듬으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성공의 길”을 발견하곤 한다.

Minale & Tattersfield의 경우에도 그랬고, 오길비 & 매더의 데이비드 오길비의 역사에서도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내걸었던 여러 가지 가치관이나 태도는, 결국 그가 성공했기 때문에 빛나는 격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의 책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를 읽는 동안에라도, 나는 내 괴팍한 소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위안을 받게 되었다.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고, 멋과 품위로 즐겁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는 아마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믿음과 존경으로 대하며, 따뜻한 관심과 재치있는 유머로 서로를 도닥이며 일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멋지지 않은가?

감히 바란다면, 이러한 토양위에, 새롭게 얻어진 기술과 새로운 매체를 충분히 활용하는 “새로운 일하는 방식”을 창조하고 싶은 것이다. 시간을 통제하고 결과물을 쥐어짜내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고 스스로의 만족과 자존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 일의 가치를 스스로 당당하게 입증할 수 있게 일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다.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그들이 언제나 편안하게 자신의 혁신을 펼쳐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나는 옛 사람의 지혜를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말 한 마디]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조조가 진궁에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사람을 쓴다거나, 부린다거나 하는 말에서나  ‘용병(用兵)’이라고 하는 말에 담긴 복잡한 뜻에 있어서나, ‘올바르다’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전쟁터에서의 지휘관이란, 아무리 유능하다 하여도 결국엔 병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대한 희생’을 통해 성취된 영광에 더 주목하곤 한다. 7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스러져간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나, 80년대를 넘어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이 부스러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기억, 달콤한 안락의 뒷골목에 감추어진 부적응자들과 패배자들에 대한 시선은, “위대한 대한민국”, “미래로 도약하는 OO기업” 등의 구호 속에 파묻혀버리기 마련이다. 그들은 모두 불가피한 희생자(casualty of war)로 간주되어버리는 것이다. 도피하는 조조를 대접하려 돼지를 잡다 몰살당한 여백사의 가족처럼 말이다.

B.브레히트씨는 “위대한 승리”를 칭송하기 위한 희생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회가 어떤 특정한 도덕에 대해서 유별나게 강조하는 경우, 반대로 그 사회는 어떤 사회적 폐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http://dsl.german.or.kr/cf98fall/hssung.htm)

‘희생’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오래도록 칭송받고, ‘희생제의’를 통해 집단의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이 인류 문명과 함께 계속되었던 까닭은, 그것이 불가피한 폭력이요 필요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 그러한가?
그 희생의 대상이 스스로이거나,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여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조조는 그의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전위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을까? 아마도 그의 인간형으로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수하들은 그런 조조의 모습을 보며 뭉클한 감동에 사로잡혀 충성을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이다. 자기 자식이나 가족을 스스럼없이 희생물로 삼을 수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진정 위대한 결단력을 가진 자로 칭송해야 하는 걸까?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제단위에 올려놓고서야 신의 은총을 받았다. 그토록 자애롭고 정의롭다는 ‘하나님’은 왜 그에게 아들을 요구했던 것일까? 그것이 비록 시험에 불과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라며 기도하게끔 명령한 십계명과 그의 시험은 설명되지 못하는 모순이 아닐까?

위기를 부르짖고 지도자가 그 구성원에게 희생과 단결을 강조할 때, 우리는 한 번쯤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 지도자가 결국은 스스로의 무능과 위기를 감추기 위해서 ‘위대한 희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지, 결국은 그가 “세상사들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 두려워 세상 사람들을 버리는” 것은 아닐지…

[말 한 마디] “고고한 척 하다”라는 그 말

“경멸하다”라는 말 한 마디가 몇 년인가 삶을 견딜 수 없게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나의 행동은 까닭없이 그 말로 번역되었고, 나는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고고한 척 하다”라는 말이, 그저 술자리의 농담일 수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3시가 넘는 시간까지 나는 그 말이 던진 파장에 흔들리고 있다. 내 삶의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는 한 귀퉁이가 그 말의 파장에 그만 무너져내린 느낌이다. 나의 진지함이, 성실하고자 함이, 그저 짐짓 아닌 척 점잖빼는 쇼에 불과했단 말인가?
나는 그 말이 가까운 사람에게서 툭 하고 아무렇지않게 던져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나의 노력이라는 것이… 그 것 밖에 될 수 없더란 말이냐?

잘못 산 건 아닐까, 내 태도가 위선적이었다는 건 아닐까, 내 삶의 방식이 한낮 농짓거리에 담겨버릴 만큼 가볍고 허황된 것이었는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예민함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느끼고 싶지 않아도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으로 스며드는 것을… 모른 척 하려 해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덤덤한 척 하려 해도, 그 고통들이 내게 다가와 우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올곧고 싶은 것이, 그럼에도 위선적인 것이, 그럼에도 저열한 것이… 그렇게 농담거리가 되어버리는 것인가? 그런건가? 그런가? 그래야만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