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기] #8. ‘사람다움’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집, 가족, 미래 (Home, Family, Future)”의 가치를 역설하며, 평화와 공존을 위해 고뇌하는 지도자 시저(Ceaser)를 지켜보며 무엇이 느껴지는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절대적 명제를 이상으로 걸었던 시저가 혁명을 함께한 코바의 손을 놓아야만 했을 때, 그의 고뇌와 분노, 갈등과 좌절감은 그 깊은 눈빛 보다 어두운 인간 본성의 깊은 바닥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전작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의 ‘깊은 물음’은 언제나 많은 생각을 품게 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반복해온 피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미움과 분노, 두려움, 편견, 오해, 질투, 잘 못된 판단, 헛된 믿음… 그 모두는 단지 살아 남고(survive), 가족(Family)과 집(Home)을 꾸려, 미래(Future)를 모색해보려는 발버둥 속에서 함께 자라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유인원들이 이룬 새로운 사회와 그들의 미래는 우리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오해와 폭력,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이상,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행동이 낳는 끔찍한 결말의 아이러니 같은 “피와 고뇌로 점철 된 인간 역사”를 반복한다.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이해와 공존의 방식으로 무리를 이끌려던 시저는 인간이 아닌, 혁명의 동지 코바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미움과 분노에서 시작된 폭력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가고, 유인원과 인간 무리 속에서 ‘믿음(trust)’과 ‘평화(peace)’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힘 없이 무너져내린다.

시저는 결국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져버리고 이성을 잃은(?) 코바를 죽게 하고, 도시를 차지한 유인원들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며 다가올 인간과의 전쟁을 예고한다. 시저와 함께 평화를 위해 분투했던 인간 말콤과 그의 가족들은, ‘이미 시작된 전쟁’을 눈앞에 두고 서서히 뒤걸음질치듯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시저가 원했던 미래는 아니었지만 유인원들은 인간의 총을 들고 무장을 했고, 스러져가는 인간들은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며 절규한다. 유인원의 시대(the Age of the Apes)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의 전쟁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유인원’의 전쟁은 그렇게 서로 닮아간다. 난간 밖으로 던져진 애쉬는 시저가 천명했던 원칙과 이상을 상기시켰기 때문에 코바에 죽음을 당한다. 코바의 오랜 상처와 분노, 복수심과 광기는 그렇게 또다른 ‘피의 역사’를 시작하게 만든 것이다.

혹성탈출_반격의_서막_@suhcs님의 트윗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나온 어떤 아버지(@suchs 서천석님)의 이 트윗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폭력과 증오와 전쟁을 멈출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아마도 진정한 용기와 인내,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노력만이 이 끔찍한 피의 역사를 멈추게 할수 있을 것이다.

서울 2014,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이 도시의 한 복판을 지나다보면,
잔뜩 부풀려져 터질 것 같은 욕망이, 두려워진다.

채워지지 못한 갈망이,
닿을 수 없는 부러움이,
초라해져버린 좌절이,

위태롭게 횡단보도 맞은 편에 서 있다.

무엇이든 부딪히면 부숴버리겠다는듯,
잔뜩 힘을 주어 우악스럽게!

[짧은 생각] 2013년의 보름을 빈 칸으로 보내고

바쁘고 분주했던 연말 연초를 보내고, 여전히 정신없이 해야 할 일들에 쫓기든 달려나가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내게 묻는다.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아직도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하지 못할 것 같다. 해야 할 일들과 지켜야 할 자리를 채워나가는 데도 급급한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을 일구어나가는 걸음을 아직 한 발 내디디지 못한 느낌이다.

Footsteps

하루하루를 빈 칸으로 흘려보내는 어리석음을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다. 걸어온 길들을 돌아보면 왠지 황량한 느낌이다.

채우고, 돌보고, 가꾸는 예쁜 정원 같은 삶을 만들고 싶다.

전략가의 운명 : 그의 전략과 운명을 함께하는 모사들 – 주유

전략을 조언하는 신하를 모사라고 부른다. 삼국지에는 수 많은 모사, 즉 전략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전략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한다. 그들이 세운 전략의 틀거리를 오늘날의 용어로 보면 “패러다임”이라고 할수 있다. 제갈량의 삼국정립은 그의 등장과 함께 시작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

제갈량을 만나는 노숙과 주유

노숙이 주유에게 제갈량을 소개하는 이 장면에서 삼국지 속의 세 나라, 위, 촉, 오의 복잡다단한 협력과 견재, 갈등과 배신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들은 저 마다의 비전과 저 마다의 전략을 품고 서로를 만났다. 주유가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제갈량을 견재하는 데 성공했다면, 혹은 그의 두려움이 부추겼던대로 제갈량을 제거했다면, 노숙이 그런 주유를 만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삼국지는 절묘한 균형의 드라마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주유의 죽음은 어찌보면 이 드라마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수순처럼 보인다. 그가 그린 세계는 제갈량이 그린 삼국정립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력하고 필연적인, 혹은 그런 힘을 담은 전략과 구상은 그에 맞서는 전략과 함께 그 전략의 창안자도 무너뜨린다. 주유는 그렇게 가장 극적인 승리의 순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환영 받지 못하던 변화–민주주의, 그리고 소셜미디어

지금은 당연한 듯 여겨지는 ‘민주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 관계를 당연히 여겨지던 세계에서, 다수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사회로의 변화는 무수한 소망과 좌절을 반복하며, 피와 눈물로 뒤엉킨 장대한 역사의 흐름이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아직도 ‘진행형’인 미완의 이상일수도 있다.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의 소망은 저마다 다르지 않을 텐데도, 그 소망을 모두가 인정하고 함께 그 가치를 지켜내는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지배’를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있던 귀족/엘리트 들은 ‘자유의 외침’이 그들의 배타적 특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결코 낭만적인 수사(修辭)가 아니었다.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듯한 이념이 그리 환영받지 못했던 까닭은, 피할 수 없는 대결과 희생, 의지의 충돌과 목숨을 건 싸움이 내포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소셜 미디어의 확산이 뜨거운 논란과 멈추지 않는 싸움을 불러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쟈스민 혁명(Jasmine Revolution —> Tunisian Revolution 항목 참조)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격동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아무도 그 방향을 가늠하지 못한 채, 아주 우연한 듯한 계기의 사건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 파장의 한 가운데에 소셜 미디어의 잠재된 힘이 있는 것이다.

  1. SNS는 재스민 혁명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 http://bit.ly/zwNHLH
  2. “SNS 혁명은 없다: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http://bit.ly/ySt2A9
  3. 아랍 수다문화 칼람, SNS 타고 시민혁명에 불 붙이다 http://bit.ly/xUREjl
  4. “SNS 무서워?”…에 드러난 그들의 두려움 http://bit.ly/xEFmuv

 

Lessons of Jasmine Revolution

Lessons of Jasmine Revolution

 

많은 사람들이 이 갑작스러운 – 밑바닥에서 응축된 변화의 힘을 살펴보면 전혀 갑작스럽지도 않은 – 격동의 힘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부분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거나,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가 한 순간에 힘없이 부정당하는 ‘좌절’을 목격하고 있는 지식인 엘리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감지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된 변화의 힘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려 한다.

소셜 미디어가 불러오고 있는 변화의 내용에는 강렬한 에너지가 함축된 정치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 이 새로운 환경이 선거에서 표를 더 모으고, 비즈니스에서 더 큰 성공을 가져오고, 새로운 틈새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데 쏠쏠한 기여를 해주는 ‘길들여진 짐승’처럼 굴어주길 기대한다면, 그건 순진한 바램일 뿐이다. 도구는 단지 편리함과 이득만 가져다주는 법이 없다. 기술의 변화가 새로운 질서 체계를 일구어내는 동력이 된 사례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소셜 미디어가 불러온 변화 속에서 어떤 미래를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각자가 서있는 입장과 이해관계가 보이는 단면을 다르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변화의 기운을 열렬히 환영하든, 불에 데인 것처럼 두려워 하든, 그 힘은 우리를 알지 못하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휩쓸고 간 어느 시점에 서서 우리는 각자의 시선으로 그 과정을 반추해 볼 것이다.

민주주의가 불손한 개념의 생각이었고, 누구나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배척받고 혹독한 탄압을 받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중(public)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위험한 존재인지, 지혜로운 존재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판명될 문제이다. 분명한 사실은. 환영받지 못하던 이 ‘생각의 씨앗’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천이었다는 것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좋은 것들’은 그 변화가 가져온 열매라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와 SNS는 어떻게 다른가?

Edgeranker 그룹에서 장정우님의 공개질문에 대해 여러 회원들의 댓글을 지켜보다가 – 소위 말하는 눈팅 ㅋ –, 여기에 대한 제 생각도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서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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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를 정의한다는 게 다소 이르지 않나 싶은 생각되기도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새로운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좀더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발전된 매체”가 아닐까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소셜미디어(Social Media)라는 것이 개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고, 이것이 사회적인 의사소통 체계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진전된 것이 변화된 점 아닐까 하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선두에 선 것이 요즘 들어 화제가 되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아닌가 합니다. 디지털 기술의 등장 이전까지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직접적인 대면접촉을 기반으로 하고 통신기술을 통한 간접 소통(전화, 문자)이 더해지는 형태로 발전해오던 것이, 정보처리 기술의 혜택이 더해지면서, 느슨한 관계에 기반한 비실시간 관계 형성이 가능해진 환경으로 발전되게 된 흐름이 아닐까 합니다. 싸이월드가 ‘일촌’이라는 개념을 서비스와 결합하며, 사진을 통한 정보와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 속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정보흐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한동안 이 모델을 따라 우후죽순처럼 개인정보와 관계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서비스들이 경쟁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고요.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이러한 관계기반 서비스 모델의 점진적인 발달의 과정 속에 탄생한 서비스의 하나라고 이해합니다만, 최근의 변화 양상을 보면 몇 개의 킬러 서비스는 자체의 서비스 모델을 플랫폼화하고 개방화된 구조체 안에서 독자적인 생태환경을 형성시켜나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대표적인 것들이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플릭커 같은 것들이죠.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인스타그램(Instagram)아니 에버노트(Evernote), 비메오(Vimeo), 텀블러(Tumblr), 인스타페이퍼(Instapaer), 슬라이드셰어(Slideshare) 같은 서비스들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서비스 영역과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유사한 관심사와 활동영역을 갖는 사람들의 관계망을 발전시켜나가기도 합니다. 이들이 애초부터 관계망을 지향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최근의 흐름은 어떤 서비스든 일정한 사회관계망(Social Network)의 속성을 모두 내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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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셜미디어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는 개념적으로 다른 이해방식을 갖는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처럼, 하나의 개념적 체계와 그의 구체적-현실적 형식의 관계 같은 거겠죠? 소셜미디어는 관계 맺음의 방식과 그것에 의해 달라지게 되는 복합적인 소통체계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SNS는 그러한 개념적 기반을 갖고 있는 현실적 체계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까지가 일차적으로 드는 생각을 적어둔 메모이고요, 관련된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가면서 좀 더 정돈된 생각들을 차근차근 더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