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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제한적 실명인증제 그리고 디지털 문화

얼마전 OECD 장관회의 개막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인터넷의 힘은 신뢰가 담보되지 않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한창 촛불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시점에서 나온 발언인지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원칙론을 이야기 한 것 처럼 보이는 이 발언의 “진의”가 그야말로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 미묘한 발언이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의 몇 몇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인터넷의… 신뢰“라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 중 하나가 통칭 인터넷 실명제, 정확히는 제한적 본인 확인 제도라는 것이다. 본래의 취지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과도하게 요구되어 유출의 위험이 높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옥션의 해킹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그 결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익명성의 폭력이라고 지칭되는 무분별한 욕설, 인신공격, 악의적인 루머, 사실 왜곡 등이 인터넷 상에서 줄어들었다고 볼수 있느가? 더 근본적으로는 풍문, 루머, 악의적인 농담, 부풀려진 이야기, 근거없는 비방, 욕설 등이 인터넷 상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인가?

화장실 낙서라는 문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화장실 뒷담화는 때로는 권력자에 대한 비아냥도 있고, 감춰진 욕구를 마구 쏟아낸 음담패설도 있고, 근거없는 비방이나 창작에 가까운 헛소문도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화장실을 벗어나 공적인 장으로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어서,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 사람도 있었고 섬세한 감수성에 상처를 받아 적잖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소통의 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기는 하더라도, 그 이야기들은 애초에 감정적 배설을 위한 목적으로 갈겨쓴 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장실 낙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이에 대한 과민한 대응에서 시작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분기점으로 한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최근의 대응은 진지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소신에 찬 자기발언 뿐만 아니라 ‘화장실 낙서’까지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이 미디어의 제도적 기능을 훼손하고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시선 속에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저 시정잡배, 어중이떠중이의 불온한 낙서라고 단정짓고마는 생각의 편향성이 담겨있다.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인터넷의 힘에 왜 신뢰가 담보되어야 하는가?

Keumho_Construct_Advertorial인터넷 매체가 언론이라고 불리우는 기성 제도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징후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 징후들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몇 몇 ‘어르신들’께서는 이 신생 매체의 불량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그들의 눈에는 이 위험한 매체가 법도 상식도, 교양머리도 없는 언터쳐블 불량 청소년처럼 보였던가 보다. 그들은 언론의 중립성, 객관성, 공익성을 근거로 인터넷 매체에게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언론이 중립적이라고? 객관적이라고? 공익을 우선한다고? … 누군가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광고와 기사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런 기사(← 읽어봅시다)를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모든 논란의 본질은 서로의 입장과 이익을 둘러싼 대립에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를 둘러썬 새삼스러운 과민반응은 그 매체가 가리키는 어떤 지향점이, 그 발언이, 그것이 날라다주는 어떤 내용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사회적 문제를 일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상들은 그것을 낳은 일정한 구조적 힘, 집단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에 넘쳐나는 각종 불량스러운 언사들, 집단적 폭력, 삽시간에 번져버리는 놀라운 전파력의 파괴적인 힘,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얻어지는 가학적 쾌감 등등의 현상들은 한 두 가지 제도를 도입하고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개방적이고,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며, 강한 결속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집단 지성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 매체에 신뢰를 요구하기에 앞서, 신뢰라는 것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 듣기 거북하다고, 무질서해보인다고, 논리적이고 세련된 어법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입을 법규와 제도로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 셈이다. 언론의 자유는 불가침의 절대적 가치라고 동의하면서 어째서 인터넷 매체의 수 많은 목소리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것인가? 인터넷 매체에 올바른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여 자신들의 지위와 호칭을 떠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한 명의 동등한 네티즌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라! 인터넷 실명제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다. 보도자료와 기사라는 제도화 된 소통의 틀을 벗어나 인터넷 매체 안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위엄있고 멋진 당신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성숙되어가는 디지털 문화가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유명무실하고 비효율적인 제도를 대신하는 그 날을 꿈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