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디지털/쟁점과 발언'에 해당되는 글 7건
- 2009/05/30 [상념] 그 분을 떠나 보내며...
- 2009/05/23 [아픔] 야만의 시절을 살고 있구나
- 2009/02/07 [돌아보기] 어느 살인범의 인권에 대하여 (1)
- 2008/11/19 [발언] '미네르바 때문이야'라고 하지는 말아야...
- 2008/10/19 [발언] '시대유감'님의 "최진실법, 반대하는 자들은 뭔가!"에 대한 유감
- 2008/08/21 [생각] 제한적 실명인증제 그리고 디지털 문화
- 2008/07/02 [생각] 아직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 손으로 뽑은 유일하게 '자랑스러워했던' 대통령.
그의 고뇌와 실수가 안타깝고, 그의 소박한 웃음에 허허로웠던,
'사람의 온기를 가진 권력'을 선물해주었던...
그 분을 떠나 보냅니다.
그 분이 꿈꾸던 세상이 언제나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으며,
세상을 사랑하며 지켜내며, 지혜를 갈구하며 품어 안는, 그런 조국을 만들어가리라 다짐하며,
그 분을 떠나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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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망연자실 하고 있다. 누구인들 이 죽음을 원했겠는가만서도... 절벽 위에 선 그의 등을 떠민 '보이지 않는 야만의 손'에 대해서는 절대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절멸시키기라도 해야 승리의 만족감을 만끽하는 이 '되먹지 못한 보복'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지도자이기에 높은 도덕성과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도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인격이며, 사람으로서의 욕구와 충동을 가진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선'을 잣대로 들이민다면 우리 중 누가 떳떳할 수 있으며, 그 잣대를 넘어 자신의 소신을 실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정치는 타협과 관용의 소산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있을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가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를 '야만'이라고 부른다. 공존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과도한 독선과 가학적 비난은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절망감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결국 그런 야만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바보 노무현'
그의 힘겨운 싸움과 인간적인 버둥거림이 한낮 냉소로 묻혀지지 않기를,
그의 간절한 소망과 처연한 몽상이 그저 술안주거리로 버려지지 않기를...
죽음의 세계 너머에서만이라도,
땅 일구고 사람들 속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행복을 얻기를...
그리고 이 땅에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야만의 희생제의는 이제 멈추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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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에게 인권이 있을까?
감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의식조차 엿보이지 않는 그의 행위에 대해 인권을 운운한다는 게 그리 적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끔직한 범죄로 못숨을 앗긴 희생자들에게 우선 조의를 표하는 것이 우선이고, 애통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살인범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의 무감각해보이기까지 하는 소름끼치는 행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의 살인행각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언론의 무책임한 취재경쟁에 대해서는 분명히 돌아보아야 할 문제가 숨어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는 얼마간의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법을 통한 심판이라는 것이 그 범죄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도 만족스럽지 못한, 즉 일반적인 '법 감정'을 거스르는 일들도 때때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체제의 어떤 부분들은 그럴만한 이유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온 지혜의 축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죄형범정주의(죄에 대해 그 형벌을 법으로 정하고,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는 제도)나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일사부재리의 원칙(하나의 죄에 대해 중복된 처벌을 가하지 않는 제도), 무죄추정의 원칙(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하여 피의자를 다루는 원칙) 등은 수 많은 시행착오와 역사적인 과오를 되돌아보며 만들어온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끔찍하고 일반적인 법감정에 비추어볼 때 그 어떤 배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사적인 감정으로는 그런 공분에 충분히 공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만 충실하여 우리가 세워온 사회적 약속의 원칙마저 무너뜨리게 되면, 사사로운 보복의 감정이 끝없는 복수와 멈추지 않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사회체계가 무너져내리는 재앙을 피해갈 방법이 없게 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한번의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이어나가는 생명력을 잃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제는 실천하기 참 어려운 선언이다. 그 만큼 복수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요, 해소할 길 없는 억울함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려운 인간적인 면모일 것이다. 사회체제는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고 죄의 대가에 대해 합의 된 댓가를 명문화하여 끝없는 보복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게 짜여진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속에 사회는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보편타당한 공분이 널리 공감되어 있는 마당에,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언론이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을 방패삼아 헌법에 명시된 인권에 대해 예외를 만드는데 앞장선다는 건 분명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을 훼손하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언론은 이제라도 냉정을 지켜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공공의 명제임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노출되어 겪게되는 피의자의 아들과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단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건, 그의 아들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명예와 인격이 침해당하게 되는 공공의 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법감정이라는 이유로 황색저널리즘이 마구 날뛰어서는 곤란하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이 사회에 입힐 뼈아픈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번쯤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인격장애'라는 조심스러운 비정상성의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경향이 만연되어버린다면 그 댓가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처입은 영혼을 돌보고 달래어 따듯하고 너그러운 사회의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조금이라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헤아리지 않고 '인격장애'라는 판정을 남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의 악순환 속에서 더더욱 강력한 '공공의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될 뿐이다.
법은 최소한이라고 했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눈앞에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냉철하게 사회적 약속이라는 제도의 이성을 지지하여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그가 아무리 끔찍한 살인범이라도 말이다. 언론은 더 이상 호기심과 말초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 대신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배려와 용서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하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걸음임을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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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남 탓'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는 하지 말자. 그런 마음이 이는 것에 대해 제발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故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해서 '(인터넷) 악플 때문이야'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대한민국 경제의 깊은 늪이 '미네르바 때문이야'라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경제의 문제는 삶의 방식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너무나 깊숙이 얽혀있는 문제이기에, 생활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치고 경제 동향에 대해 귀를 쫑긋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흉흉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가까운 곳에서 험한 일들이 벌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속엔 커다란 동요와 불안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혼란의 시기엔 점쟁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종교행사에 열심인 사람도 늘어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누구의 탓으로 말할 수 있을까? 굳이 탓한다면 지도자의 부덕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나라의 지도자는 모름지기 다스리기 보다 섬겨야 한다고 옛 지혜들은 얘기한다. 백성을 섬기는 일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부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 이끌며, 불안이 퍼지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일 같은 것들... 우리의 지도자들은 왜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달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안방에는 찬바람이 넘나들지 않고, 그들의 곳간에는 쌀이 넉넉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통찰하는 지혜가 부족하단 말인가?
불안은 전염병처럼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이다. 희망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참담한 현실에 부딪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불안의 그림자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데, 어찌 위험을 경고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미네르바는 그 위험을 자각하도록, 아무도 바라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다가오는 파국에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경거망동하는 '몽매한 군중'을 선동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녁 무렵 식당에 가면 깊은 탄식을 안주로 삼아 위험한 앞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어르신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을 모두 입 단속을 시키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인가? 불안이 퍼져나가는 것이 집단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건 모두가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흉흉한 민심이 기대하는 건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손 쉬운 처방이 아니라, 그 불안을 모두 그러안는 넉넉한 마음과 커다란 비전일 것이다.
제발...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드는 것도 대통령의 탓인 나라로 남아서는 희망의 미래를 품을 수가 없다. 지금의 위기는 누군가의 탓이 아니라, '신용'이라는 현혹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허공에 세워두고 기뻐하던 우리 모두의 무지와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를 탓한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불안한 미래를 전망했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당하는 미네르바의 탓이 아니다. 잘 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실한 인내심을 갖고 성난 목소리를 달래야 할 때이다.
인터넷은 열린 공간이다.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불안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그들의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들이 불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날것으로 드러내주는 공간이다. 그 공간 속으로 들어와 차분히 앞으로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독설 같은 전망에 대해 찬찬히 근거를 들어 보이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전망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불길한 목소리를 잠재울만한 통찰력 있고 성실한 설득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만나고 싶다. 우리의 디지털 문화가 그 정도의 성숙함은 보여줄 역량은 안 된단 말인가? 그도 이야기 할 수 없다면... 그저 입을 다물고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Tistory 태그: 미네르바,불안,인터넷,디지털 문화,선동,설득,신뢰,지도자,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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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길한 예감은 한나라당 홍준표의원이 발빠르게도 '최진실법 반드시 통과시킬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며 논란을 가열시켰고, 위의 '시대유감' 같은 논객들의 부르짖음이 뒤따랐다. 몇 년 전엔가도 "그린박스제도"라는 것을 입법화 하려했던 전여옥 의원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한다며 인터넷 매체의 문제점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타인에 대한 잔인한 본능, 공격성을 지니고 / 인터넷에서 익명성으로 무장하고 /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격을 합니다" [출처] 최진실의 '장미빛 인생'|작성자 전여옥
인터넷 매체가 가진 불안전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디어적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기간에 비해 그 영향력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나름대로의 질서와 자정기능을 가진 미디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 구석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문화적 현상들이 삐져나오고 있습니다.'악플'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악의적 가십' 또는 한 개인의 명예를 무책임하게 땅에 떨구는 '근거없는 헛소문'들은 수 많은 피해자들을 쏟아내고 있고, 그로 인해 가슴아픈 뉴스를 접하게 되는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마땅히 사회적 규범아래 걸러지고 다스려져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만한 일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냉정을 잃고 광풍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최진실법'이란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사이버 모욕죄'의 법안 같은 움직임이 그런 것이죠.
이러한 법안의 상정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당연히 필요한 입법제도의 일부로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법안이 현실적으로 기대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법은 최소한'이라는 말마따나 '사이버 모욕'이라는 문제가 법으로 밖에는 규범을 지키게 할 수 없는 문제인지, 그 법안으로 인해 야기될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차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한 유명인의 죽음이 인터넷 악플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현상을 빌미로 본질을 도외시한 선동을 일으켜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미디어의 문제점은 반드시 인터넷 미디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황색언론'이라고 불리는 수 많은 매체들은 저급한 호기심과 선정적 이미지들로 광고를 끌어모으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포츠 신문 시장이 과열경쟁과 수익성 악화에 빠지면서 그들이 벌인 선정적인 편집과 낚시성 헤드라인 경쟁은 오늘날의 인터넷 매체나 '악플'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병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권가의 루머들이 피워올리는 '카더라 통신'의 이야기는 거의 화장실 낙서나 다름없는데도, 나름대로 근거있는 정보 소스로 간주되며 여전히 날개돋힌듯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론을 형성시키는 언론매체의 제도적 기능과 기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을 늘어뜨린 병폐가 함께 해왔던 것입니다.
최진실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의 유가족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 이 명칭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이란 말입니까? 만인의 사랑을 받던 배우 고 최진실씨의 죽음과 인터넷 미디어의 병폐를 동일시 하려는 이름붙이기는 아닌지요? 현상적으로 나타난 문제의 심각성은 수긍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도, 법안을 마련하고 신중하게 검증도 되지 않은 제도적 규약을 걸어버리는 것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회적으로 인터넷 미디어가 가지는 속성과 작동원리에 대해 충분히 성숙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좀더 차분하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 사회적인 공론이 성숙되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적 폐해라는 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듯, 그 해결점 또한 손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익명성의 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사회적 병폐입니다. 그렇지만 '악플'의 문제도 다른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박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인식과 문화의 힘으로 균형잡힌 디지털 문화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DT와 같은 화학적 방제가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오히려 깨트려 더 큰 문제를 초래하였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 죽음이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의 단초를 일으킬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최진실법'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감정적 선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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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의 몇 몇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인터넷의... 신뢰"라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 중 하나가 통칭 인터넷 실명제, 정확히는 제한적 본인 확인 제도라는 것이다. 본래의 취지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과도하게 요구되어 유출의 위험이 높은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옥션의 해킹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그 결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익명성의 폭력이라고 지칭되는 무분별한 욕설, 인신공격, 악의적인 루머, 사실 왜곡 등이 인터넷 상에서 줄어들었다고 볼수 있느가? 더 근본적으로는 풍문, 루머, 악의적인 농담, 부풀려진 이야기, 근거없는 비방, 욕설 등이 인터넷 상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인가?
화장실 낙서라는 문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화장실 뒷담화는 때로는 권력자에 대한 비아냥도 있고, 감춰진 욕구를 마구 쏟아낸 음담패설도 있고, 근거없는 비방이나 창작에 가까운 헛소문도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화장실을 벗어나 공적인 장으로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어서, 명예에 큰 손상을 입는 사람도 있었고 섬세한 감수성에 상처를 받아 적잖이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소통의 한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기는 하더라도, 그 이야기들은 애초에 감정적 배설을 위한 목적으로 갈겨쓴 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장실 낙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은 이에 대한 과민한 대응에서 시작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분기점으로 한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최근의 대응은 진지한 정치적 의사표현과 소신에 찬 자기발언 뿐만 아니라 '화장실 낙서'까지도 수면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이 미디어의 제도적 기능을 훼손하고 있다고 하는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그 시선 속에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유통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저 시정잡배, 어중이떠중이의 불온한 낙서라고 단정짓고마는 생각의 편향성이 담겨있다.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인터넷의 힘에 왜 신뢰가 담보되어야 하는가?
인터넷 매체가 언론이라고 불리우는 기성 제도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징후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 징후들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몇 몇 '어르신들'께서는 이 신생 매체의 불량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던가 보다. 그들의 눈에는 이 위험한 매체가 법도 상식도, 교양머리도 없는 언터쳐블 불량 청소년처럼 보였던가 보다. 그들은 언론의 중립성, 객관성, 공익성을 근거로 인터넷 매체에게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언론이 중립적이라고? 객관적이라고? 공익을 우선한다고? ... 누군가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광고와 기사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런 기사(읽어봅시다)를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모든 논란의 본질은 서로의 입장과 이익을 둘러싼 대립에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를 둘러썬 새삼스러운 과민반응은 그 매체가 가리키는 어떤 지향점이, 그 발언이, 그것이 날라다주는 어떤 내용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에 재갈을 물리고 싶은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사회적 문제를 일소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상들은 그것을 낳은 일정한 구조적 힘, 집단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비로소 올바른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 마련이다. 인터넷 매체에 넘쳐나는 각종 불량스러운 언사들, 집단적 폭력, 삽시간에 번져버리는 놀라운 전파력의 파괴적인 힘,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서 얻어지는 가학적 쾌감 등등의 현상들은 한 두 가지 제도를 도입하고 위협을 가한다고 해서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개방적이고,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며, 강한 결속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올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집단 지성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다.
인터넷 매체에 신뢰를 요구하기에 앞서, 신뢰라는 것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 어떤 기준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 듣기 거북하다고, 무질서해보인다고, 논리적이고 세련된 어법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의 입을 법규와 제도로 통제하려고 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중대한 위반인 셈이다. 언론의 자유는 불가침의 절대적 가치라고 동의하면서 어째서 인터넷 매체의 수 많은 목소리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려 하는 것인가? 인터넷 매체에 올바른 목소리가 담겨야 한다고 믿는다면,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이여 자신들의 지위와 호칭을 떠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한 명의 동등한 네티즌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라! 인터넷 실명제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다. 보도자료와 기사라는 제도화 된 소통의 틀을 벗어나 인터넷 매체 안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위엄있고 멋진 당신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한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성숙되어가는 디지털 문화가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유명무실하고 비효율적인 제도를 대신하는 그 날을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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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많이 외로우셨죠'
광우병 쇠고기 파문으로 시작된 촛불 집회는 벌써 두 달이 넘게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듯 하무덤덤 하던 그 소식에 뭉클하고 가슴을 때리는 영상 하나가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아... 신부님, 우리 신부님...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고, 깨우침을 주고, 진실의 힘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분들의 목소리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글을 쓰게 하고 있다.
"시위의 원칙은 평화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하늘이 주는 평화다. 우리와 뜻이 다른 분도 있다. 그 분들이 격정적인 감정 휩싸일 때 나무라지 말고 꼭 안아 달라.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어도 평화행진은 꺼지게 된다. 마치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이 조심조심, 어떤 아주머니가 출렁이는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는 것처럼 살포시 거리행진을 시작하자." (7월 1일 김인국 신부님의 강론 중)
"전문시위꾼이 주도? 예수님은 '전문시위꾼'이 맞다" (7월 1일 김인국 신부님의 강론 중)
이 영상들은 그 어떤 저널리즘 보다 강한 힘으로 나의 마음에 불을 붙였고, 사람들 모두의 손에 돌려진 디지털 미디어가 그 어떤 방식의 통제와 조작을 뒤엎고 "진실"을 드러내는 옳바른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도록 애써 무덤덤하려 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되는 날에도 나는 애써 무덤덤했다.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저녁 총선 결과 방송을 보며 이민을 가야 하나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해보았지만, 나는 애써 입을 닫았다.
이런 후보를 우리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으로 선택하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역사의 한 사실로 기록된 어처구니 없는 선거 결과였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나는 이때 지독히 아팠다.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는구나... " ,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절실한 열망이 우리의 눈과 귀를 이렇게 손쉽게 가려버리기도 하는구나" 하며, 체념을 익히기 시작했다.
일이 일인지라 이따금씩 돌아보는 동영상 사이트에서 이런 저런 영상들을 지켜보곤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람들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뭉클하기도 했고, 기억 속에 잊혀진 줄 알았던 물대포와 체포조 헬맷을 보면서 피가 꺼꾸로 솟는 듯 했지만,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이 모든 결과는 결국 우리 모두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던 당연한 귀결이라고, 100일만에 '2MB'라는 치욕적인 별명이 붙인 대통령을 결국은 우리 손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모두들 잠재적 공범이라고 그렇게 단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 영상들을 보면서 비겁했던 것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애서 침묵하려 했던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무리들의 저열한 비방처럼 이 영상들이 "시위꾼들의 선동"이라고 치자. 그렇게 비방하는 자들이 무엇을 보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민주주의를 지켜온 진실과 진심임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미디어를 그저 "매개"라고 여기는 순진한 생각을 이젠 버려야 한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미디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읽는 자신의 태도를 담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은 오래도록 "언론"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편집당했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의 손에 쥐어진 디지털미디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스스로 볼 것을 선택하고, 그 것에 의해 세상을 읽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가르켜주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보려 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몰랐다는 변명은, 그저 보지 않으려 했거나, 눈을 감았거나, 게으름에 눈이 먼 바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손바닥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면, 이제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 진실의 뜨거움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7월 5일, 나는 부끄러움을 씻고 역사의 한 자리를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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