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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02 [생각] 디지털 세계 속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다 (1)
- 2009/05/30 [상념] 그 분을 떠나 보내며...
- 2009/05/23 [아픔] 야만의 시절을 살고 있구나
- 2009/02/07 [돌아보기] 어느 살인범의 인권에 대하여 (1)
- 2008/11/24 [짧은 생각] 공적인 것, 사적인 것, 그리고 블로그 (1)
- 2008/11/19 [발언] '미네르바 때문이야'라고 하지는 말아야...
- 2008/11/18 [블로그] 블로그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 2008/10/30 [말 한마디] "그게 원래 한국 문화 아닌가"
- 2008/10/19 [발언] '시대유감'님의 "최진실법, 반대하는 자들은 뭔가!"에 대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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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한마디] "그게 원래 한국 문화 아닌가" (0) | 2008/10/30 |
내 손으로 뽑은 유일하게 '자랑스러워했던' 대통령.
그의 고뇌와 실수가 안타깝고, 그의 소박한 웃음에 허허로웠던,
'사람의 온기를 가진 권력'을 선물해주었던...
그 분을 떠나 보냅니다.
그 분이 꿈꾸던 세상이 언제나 우리를 희망으로 인도할 것이라 믿으며,
세상을 사랑하며 지켜내며, 지혜를 갈구하며 품어 안는, 그런 조국을 만들어가리라 다짐하며,
그 분을 떠나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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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망연자실 하고 있다. 누구인들 이 죽음을 원했겠는가만서도... 절벽 위에 선 그의 등을 떠민 '보이지 않는 야만의 손'에 대해서는 절대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절멸시키기라도 해야 승리의 만족감을 만끽하는 이 '되먹지 못한 보복'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지도자이기에 높은 도덕성과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도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인격이며, 사람으로서의 욕구와 충동을 가진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선'을 잣대로 들이민다면 우리 중 누가 떳떳할 수 있으며, 그 잣대를 넘어 자신의 소신을 실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정치는 타협과 관용의 소산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있을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가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를 '야만'이라고 부른다. 공존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과도한 독선과 가학적 비난은 우리 모두에게 더 큰 절망감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우리는 결국 그런 야만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바보 노무현'
그의 힘겨운 싸움과 인간적인 버둥거림이 한낮 냉소로 묻혀지지 않기를,
그의 간절한 소망과 처연한 몽상이 그저 술안주거리로 버려지지 않기를...
죽음의 세계 너머에서만이라도,
땅 일구고 사람들 속에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행복을 얻기를...
그리고 이 땅에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르는 야만의 희생제의는 이제 멈추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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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범에게 인권이 있을까?
감정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죄의식조차 엿보이지 않는 그의 행위에 대해 인권을 운운한다는 게 그리 적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끔직한 범죄로 못숨을 앗긴 희생자들에게 우선 조의를 표하는 것이 우선이고, 애통하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비통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살인범의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의 무감각해보이기까지 하는 소름끼치는 행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의 살인행각에 대해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는 언론의 무책임한 취재경쟁에 대해서는 분명히 돌아보아야 할 문제가 숨어있다.
사회의 모든 시스템에는 얼마간의 결함이 있게 마련이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법을 통한 심판이라는 것이 그 범죄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도 만족스럽지 못한, 즉 일반적인 '법 감정'을 거스르는 일들도 때때로 일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들고 지켜가는 사회체제의 어떤 부분들은 그럴만한 이유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온 지혜의 축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죄형범정주의(죄에 대해 그 형벌을 법으로 정하고,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는 제도)나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일사부재리의 원칙(하나의 죄에 대해 중복된 처벌을 가하지 않는 제도), 무죄추정의 원칙(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간주하여 피의자를 다루는 원칙) 등은 수 많은 시행착오와 역사적인 과오를 되돌아보며 만들어온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끔찍하고 일반적인 법감정에 비추어볼 때 그 어떤 배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적어도 사적인 감정으로는 그런 공분에 충분히 공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만 충실하여 우리가 세워온 사회적 약속의 원칙마저 무너뜨리게 되면, 사사로운 보복의 감정이 끝없는 복수와 멈추지 않는 폭력으로 점철되어 사회체계가 무너져내리는 재앙을 피해갈 방법이 없게 된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한번의 실수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되어버린다면, 그 사회는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이어나가는 생명력을 잃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명제는 실천하기 참 어려운 선언이다. 그 만큼 복수심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요, 해소할 길 없는 억울함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려운 인간적인 면모일 것이다. 사회체제는 그렇기 때문에 사사로운 형벌을 금하고 죄의 대가에 대해 합의 된 댓가를 명문화하여 끝없는 보복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게 짜여진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 속에 사회는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보편타당한 공분이 널리 공감되어 있는 마당에,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언론이 보다 냉철하게,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건을 다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언론이 앞장서서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을 방패삼아 헌법에 명시된 인권에 대해 예외를 만드는데 앞장선다는 건 분명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을 훼손하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언론은 이제라도 냉정을 지켜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원칙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공공의 명제임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노출되어 겪게되는 피의자의 아들과 가족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단지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건, 그의 아들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명예와 인격이 침해당하게 되는 공공의 린치를 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공감하는 법감정이라는 이유로 황색저널리즘이 마구 날뛰어서는 곤란하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이 사회에 입힐 뼈아픈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 번쯤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인격장애'라는 조심스러운 비정상성의 꼬리표를 달아버리는 경향이 만연되어버린다면 그 댓가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처입은 영혼을 돌보고 달래어 따듯하고 너그러운 사회의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사라지고, 조금이라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헤아리지 않고 '인격장애'라는 판정을 남발하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신의 악순환 속에서 더더욱 강력한 '공공의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될 뿐이다.
법은 최소한이라고 했다.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눈앞에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냉철하게 사회적 약속이라는 제도의 이성을 지지하여야 한다. 피의자의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 그가 아무리 끔찍한 살인범이라도 말이다. 언론은 더 이상 호기심과 말초적 감정을 부채질하는 보도를 중단해야 한다. 그 대신 우리 사회가 더 안전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배려와 용서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목소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향하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걸음임을 분명히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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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대비되는 단어로 생각하면 명료하고 분명해진다.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곧은 것과 굽은 것... 그래서 흔히 사물을 바라볼 때 이러한 논법을 들이대면 모호하던 것들이 또렷하게 보이면서 분명한 판단을 할 수가 있게 된다. 모호한 것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 사람들은 갈래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바라보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때때로 그런 명료한 선택을 어렵게 하는 애매한 대상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멈추어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통찰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반드시 대립되는 쌍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이따금씩 생각해보게 된다. 이 글은 개인적인 이야기에 속할까, 공적인 발언으로 다루어야 할까? 자신의 생각을 아무런 제약없이 적는다는 점에서 블로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쓰기일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누군가 읽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쓴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특히 그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이 일정한 수를 넘어서고, 그 글이 이곳 저곳 인터넷 미디어를 타고 전파된다고 한다면, 그 글은 이미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만큼의 사람이 보게 되면, 또 어떠한 매체에 옮겨지게 되면 공적인 글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며 느낀 소회를 자신의 블로그에 적는다면, 그 글은 과연 사적인 독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요즘 온 나라가 한 인터넷 논객의 글로 인해 온통 들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그의 발언이 언론 매체에도 인용되고 있고, 방송 시사 프로그램과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그의 발언을 두고 비판과 지지가 엇갈리고 있다. 경제에 대한 그의 식견이 놀랍도록 높아,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의 글을 전부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전통적인 공적인 글쓰기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거리낌없이 그의 생각을 상당히 '사적인' 어투로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애초에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일까? 이제 그의 글은 왠만한 신문 사설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고, 찬탄과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여전히 개인 자격으로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블로그라는 도구가 창출한 '열린 공간'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누구나 언제든 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남아있다. 블로그를 가리켜 '1인 미디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애체의 공적인 성격에 대해 이미 동의한 것일까? 그렇다면 블로그에 올라온 이야기는 모두 근거가 있고, 확인 된 사실이며, 출처가 분명한 것이라고 간주해야 한단 말인가? 하루 방문자가 수 천명을 넘는 블로그의 주인이 실수로 잘못된 사실을 올린다거나, 누군가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는 언사를 한다던가, 단순한 가정이가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를 사실과 혼동할 수 있게 얘기한다면 그 결과가 미칠 파장은 과연 개인의 말실수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블로거들에게 언론인의 정신과 엄정한 책임을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블로그가 점점 영향력을 얻어갈 수록 우리는 분면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새로운 문화적 현상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지껏 우리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장에 늘어놓는 것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살았다. 자신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게 정제되어 일정한 형식 안에서 언급 되어야 하고, 솔직한 생각이나 느낌은 자신만의 사적인 영역에 보관해 둘 것을 권고 받았다. 우리가 블로그라는 도구를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는 장이라기 보다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두는 데에 쓰는 까닭은 아마도 이러한 문화적 경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블르고를 공적인 발언 공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블로그를 둘러싼 문화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개개인의 감상을 적고 일상을 기록하던 도구가 이제는 가히 왠만한 신문이나 방송과 맞먹는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들(의) 미디어(we media)인 블로그는 그 열린 공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 열린 소통의 도구로서 유용하게 사용하면서도, 그 뒷면의 어두운 폐혜를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지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면 한 동안은 그를 둘러싸고 혼란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 분명한 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블로그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적일 수도 있는 소통의 수단이다. 명쾌하게 어느 한편으로 가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조심스럽고 심사숙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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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면 내 덕, 못 되면 남 탓'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는 하지 말자. 그런 마음이 이는 것에 대해 제발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故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해서 '(인터넷) 악플 때문이야'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대한민국 경제의 깊은 늪이 '미네르바 때문이야'라고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경제의 문제는 삶의 방식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너무나 깊숙이 얽혀있는 문제이기에, 생활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치고 경제 동향에 대해 귀를 쫑긋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흉흉한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가까운 곳에서 험한 일들이 벌어지면, 사람들의 마음속엔 커다란 동요와 불안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혼란의 시기엔 점쟁이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종교행사에 열심인 사람도 늘어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누구의 탓으로 말할 수 있을까? 굳이 탓한다면 지도자의 부덕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게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나라의 지도자는 모름지기 다스리기 보다 섬겨야 한다고 옛 지혜들은 얘기한다. 백성을 섬기는 일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느라 부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 이끌며, 불안이 퍼지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일 같은 것들... 우리의 지도자들은 왜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달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안방에는 찬바람이 넘나들지 않고, 그들의 곳간에는 쌀이 넉넉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통찰하는 지혜가 부족하단 말인가?
불안은 전염병처럼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이다. 희망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참담한 현실에 부딪혀 설득력을 잃게 된다. 불안의 그림자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데, 어찌 위험을 경고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미네르바는 그 위험을 자각하도록, 아무도 바라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다가오는 파국에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경거망동하는 '몽매한 군중'을 선동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녁 무렵 식당에 가면 깊은 탄식을 안주로 삼아 위험한 앞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어르신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을 모두 입 단속을 시키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인가? 불안이 퍼져나가는 것이 집단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건 모두가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흉흉한 민심이 기대하는 건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손 쉬운 처방이 아니라, 그 불안을 모두 그러안는 넉넉한 마음과 커다란 비전일 것이다.
제발...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드는 것도 대통령의 탓인 나라로 남아서는 희망의 미래를 품을 수가 없다. 지금의 위기는 누군가의 탓이 아니라, '신용'이라는 현혹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허공에 세워두고 기뻐하던 우리 모두의 무지와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를 탓한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불안한 미래를 전망했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당하는 미네르바의 탓이 아니다. 잘 못된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성실한 인내심을 갖고 성난 목소리를 달래야 할 때이다.
인터넷은 열린 공간이다. 국민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불안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그들의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들이 불신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날것으로 드러내주는 공간이다. 그 공간 속으로 들어와 차분히 앞으로의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미네르바의 독설 같은 전망에 대해 찬찬히 근거를 들어 보이며,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전망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불길한 목소리를 잠재울만한 통찰력 있고 성실한 설득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만나고 싶다. 우리의 디지털 문화가 그 정도의 성숙함은 보여줄 역량은 안 된단 말인가? 그도 이야기 할 수 없다면... 그저 입을 다물고 '누구누구 때문이야'라고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Tistory 태그: 미네르바,불안,인터넷,디지털 문화,선동,설득,신뢰,지도자,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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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 더 없이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아니 블로그는 애초에 이야기를 담기 위해 탄생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장의 한 복판에서 어떤 미디어도 현장에 접근할 수 없을 때, 이라크의 한 청년은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담아 세상에 알렸다. 세계의 주요 언론은 은 그의 목소리를 뉴스로 재편성하여 이라크전의 참상을 전하였다. 전쟁터에서 가느다랗게 삶을 이어가던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를 통해 세상을 울렸다.
블로그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옆집에 사는 이웃들의 하루하루를 소재로 삼을 수도 있고, 자신의 직장이나 학교에서 포착된 삶의 단면을 담을 수도 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가녀린 이야기들에 목소리를 실어 블로그에 담기도 한다. '우리들의 미디어(we media)'는 그 누구의 간섭도, 가위질도 없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실어날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블로그에게서 그 사람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기대하게 된다.
역사의 한 장면에서 우리는 위대한 연설이 남긴 강렬한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하곤 한다. 로마의 시저가 갈리아 전쟁에서 남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일갈은 그의 담백하고 선 굵은 성격을 뚜렷하게 떠올리게 한다. 그의 암살 직후 포로 로마노에서 열린 그 유명한 브루투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역사의 향방을 가름하게 된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변화(Change)'라는 시대적 명제 하나를 일관되게 이야기하여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역사의 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블로그에 남아있다. 그의 연설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도, CNN이나 MSNBC의 뉴스를 접하지 못한 사람도, 그리고 역사의 시간이 흘러 몇 세대의 후손들도 그의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에게 블로그라는 매체가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가장 열렬한 지지층을 가진 파워 블로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록에 남겨진 그의 말과 행동 하나 하나는 당시 로마의 시대적 아이콘이 되었고, 또한 그 자신의 인물 됨됨이를 또렷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단지 기록으로 쓰여진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블로그가 창출한 새로운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블로그에는 당신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그 사람됨이 가진 힘과 설득력, 그리고 매력이 당신의 블로그에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 이전 시대의 어떤 누구도 이러한 열린 연단에 설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직 블로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발언대를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라.
* P.S :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들을 주워다 붙여놓는 일(펌질)은 구태여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날이 발달되어 가는 검색이 당신이 필요로 할 때, 꼭 알맞은 정보를 찾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왜 퍼가기 버튼에 마우스를 올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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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4세인 이 마리나씨가 한 이야기다.
“한국 남성 분들은 골프를 친 다음, 100이면 100명 다 밤에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 안내를 요구해요. 그러고는 욕을 합니다. ‘우즈베크는 호텔도 안 좋고, 음식도 안 좋고, 볼 것도 없다. 아가씨라도 이뻐야지. 한국 탤런트 닮은 미인 많다더니 이게 뭐냐’ 하면서 화를 냅니다.”
그는 처음엔 놀랐지만, 같은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되면서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한국엔 딱 한번 일주일 동안 방문했다는 그는 “그게 원래 한국 문화 아닌가” 하고 반문했다.
(출처 : 인터넷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18877.html)
외국에서 들려오는 '한국',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참 부끄럽고, 한편으론 서글퍼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의 입에서 우리의 현재 모습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발견하게 될때,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한 줌 자긍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졸부 근성이라고 하던가? 자기가 가진 한 웅큼 재산을 그토록 위세떨치고 싶어하는 조바심을? 골프를 치고, 술을 마시고, 아가씨를 탐하기 위한 목적이 여행의 전부여서야 말이 되는가? 낯선 땅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이 그럴 수 있다 하여도, 설마 그 방종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지 않을까 ?
원래 한국 문화라는 게, 술마시고 난장 부리고, 2차 3차까지 비틀비틀 하다가 끝내는 아가씨끼고 분탕질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하지 않는가? 타슈켄트라는 오지까지 가라오케를 보급시키고, 그 원류를 알 수 없는 난장판 문화가 '한국에서 비롯된'이라고 수식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이 마리나씨에게, 해외의 동포 후손들에게, '한국의 문화'라는 게 그렇지 않다고, 아름답고 건강한 한국인의 삶의 모습과 넋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원래 한국 문화'라는 그 말 한마디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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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길한 예감은 한나라당 홍준표의원이 발빠르게도 '최진실법 반드시 통과시킬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하며 논란을 가열시켰고, 위의 '시대유감' 같은 논객들의 부르짖음이 뒤따랐다. 몇 년 전엔가도 "그린박스제도"라는 것을 입법화 하려했던 전여옥 의원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한다며 인터넷 매체의 문제점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타인에 대한 잔인한 본능, 공격성을 지니고 / 인터넷에서 익명성으로 무장하고 / 그야말로 무자비한 공격을 합니다" [출처] 최진실의 '장미빛 인생'|작성자 전여옥
인터넷 매체가 가진 불안전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디어적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기간에 비해 그 영향력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나름대로의 질서와 자정기능을 가진 미디어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 구석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문화적 현상들이 삐져나오고 있습니다.'악플'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악의적 가십' 또는 한 개인의 명예를 무책임하게 땅에 떨구는 '근거없는 헛소문'들은 수 많은 피해자들을 쏟아내고 있고, 그로 인해 가슴아픈 뉴스를 접하게 되는 빈도도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마땅히 사회적 규범아래 걸러지고 다스려져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킬만한 일이기 때문에, 한 순간에 냉정을 잃고 광풍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최진실법'이란 수식어를 달고 등장한 '사이버 모욕죄'의 법안 같은 움직임이 그런 것이죠.
이러한 법안의 상정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의제 설정'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당연히 필요한 입법제도의 일부로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법안이 현실적으로 기대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법은 최소한'이라는 말마따나 '사이버 모욕'이라는 문제가 법으로 밖에는 규범을 지키게 할 수 없는 문제인지, 그 법안으로 인해 야기될 또 다른 문제는 없는지 차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한 유명인의 죽음이 인터넷 악플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현상을 빌미로 본질을 도외시한 선동을 일으켜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미디어의 문제점은 반드시 인터넷 미디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황색언론'이라고 불리는 수 많은 매체들은 저급한 호기심과 선정적 이미지들로 광고를 끌어모으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포츠 신문 시장이 과열경쟁과 수익성 악화에 빠지면서 그들이 벌인 선정적인 편집과 낚시성 헤드라인 경쟁은 오늘날의 인터넷 매체나 '악플'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병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권가의 루머들이 피워올리는 '카더라 통신'의 이야기는 거의 화장실 낙서나 다름없는데도, 나름대로 근거있는 정보 소스로 간주되며 여전히 날개돋힌듯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론을 형성시키는 언론매체의 제도적 기능과 기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이지만, 그 이면에는 항상 어두운 그늘을 늘어뜨린 병폐가 함께 해왔던 것입니다.
최진실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의 유가족들로부터 동의를 받은 것도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닌 이 명칭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이란 말입니까? 만인의 사랑을 받던 배우 고 최진실씨의 죽음과 인터넷 미디어의 병폐를 동일시 하려는 이름붙이기는 아닌지요? 현상적으로 나타난 문제의 심각성은 수긍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도, 법안을 마련하고 신중하게 검증도 되지 않은 제도적 규약을 걸어버리는 것만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회적으로 인터넷 미디어가 가지는 속성과 작동원리에 대해 충분히 성숙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좀더 차분하게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해 사회적인 공론이 성숙되길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적 폐해라는 것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듯, 그 해결점 또한 손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익명성의 폭력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사회적 병폐입니다. 그렇지만 '악플'의 문제도 다른 사회문제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박멸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인식과 문화의 힘으로 균형잡힌 디지털 문화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DT와 같은 화학적 방제가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오히려 깨트려 더 큰 문제를 초래하였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상처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 죽음이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의 단초를 일으킬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최진실법'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감정적 선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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