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각하기] #5. 페이스북이 인터넷을 대체하는 세상을 향한다면?!

페이스북이 internet.org를 통해 저개발국가의 인터넷 접속을 돕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했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도 많았습니다.
 
페이스북은 하루에서 가장 긴 접속 시간을 가진 웹 서비스이고,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를 증거하는 신분증 같은 역할을 하는 프로필이며,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고, 어디에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것에 열광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등등-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공개된 일기장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페이스북 안에서 삶을 기록하고, 생각을 만들어가고, 세상을 이해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이 문득 ‘두렵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그 영향력이 막연히 두려웠던걸까요, 아니면,10억이 넘는 사용자를 보유하고도 끊임없이 새로운 이용자를 확보하려는 페이스북의 숨겨진 – 그리 숨기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 – 의도가 거북해서였던건 아닐까요?
 
아래는 ‘“짐이 곧 인터넷”…드러나는 페이스북의 야심’이라는 블로터의 기사를 접하고, 떠오른 생각을 페이스북에 적어보았던 포스팅입니다.

페이스북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용자, 더 많은 콘텐츠, 더 많은 시간과 촘촘한 연결을 지향하는 건 당연하다. 이 지향점이 현실적 힘을 얻게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네이버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커졌을 …

Posted by Andrew Yim on Monday, January 18, 2016

이 포스팅을 올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막연했던 두려움의 정체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막연히 들었던 ‘두려움’의 이유는 다양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우려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자유’를 위협받을 수도 있겠다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근본적인 원인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지배하는 누군가’를 상정해보면 답답하고, 벗어나고 싶은 본능이 꿈틀되는 것이니까요.

페이스북은 이미 우리의 관계 방식, 소통의 방식, 가치관과 태도에 이르는 거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국가 제도나 사회 공동체가 미치는 영향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이 것’이 투명하게 운영되고, 누군가의 견재를 받아야 마땅하고,  사회적 합의와 조율이 가능해지기를, 그럼으로써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페이스북이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가 ‘공공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internet.org by Facebook

internet.org by Facebook

누구나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도록 하는 세상을 꿈꾸는 페이스북이 ‘보편접 접속의 권리’를 주장하려 한다면, 이 지향점은 이미 사적인 기업의 역할로 한정하기 어려운, 모든 사회 공동체의 이익과 이해관계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니까요…

페이스북은 여전히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주체입니다.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일이 더 이상은 국가나 공적 기구의 일만은 아닌 세상입니다만, 페이스북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제어할 장치가 없는 현재의 상황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건 당연해 보입니다. 페이스북이 말하는 “The more we connect, The better it gets.”라는 이 멋진 말에서 더 나아진다는 이 ‘it’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사례] Coca-Cola 인스타그램 low frame 영상 – 2016.01.08

코카-콜라 글로벌 인스타그램(@Cocacola)에서 1백만 팔로워 기념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일반적인 영상보다 프레임수를 현저하게 낮춰
슬라이드 쇼 같기도 하고, 하이라이트 앨범 같기도 한 이미지를 보여주는군요!

[생각의 씨앗] 글쓰기에 대한 갈증 vs. 생각을 벼리는 습관

해마다 ‘글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자책을 해봅니다. 글을 쓰지 못하면, 생각은 제 갈길을 못 찾고 흐트러진 혼란 속에 두려움이 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 그 갈증을 느끼면서도, 글을 내놓은 것에는 게으름에 가깝게 불성실했던게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사뭇 성스러운 의무로 여기면서도, 정작 세상에 글을 내놓는 건 몹시도 두려워했습니다. 열망도 큰 만큼, 두려움도 크기 때문에, 섣부른 글쪼가리를 내놓기가 꺼려졌던 까닭입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웠을까요? 어차피 읽어 볼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인 게 뻔한데, 세상에 한줌 무게도 더하지 못하고,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할텐데 말입니다. 두려움이란 핑계고, 어쩌면 그냥 게을렀던 건 아닐지 의심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군살이 붙은 몸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무뎌진 생각과 흐리멍덩한 눈이 갑자기 보기 싫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꼭 ‘책읽기’를 채근하거나, 이제는 제발 글을 쓰자고 다짐을 해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담배 끊기나 몸 만들기처럼, 글쓰기도 한 해의 끝자락에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새해 결심’ 같은 것이 되버리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벌써 12월이고, 한 해가 마무리되어가다보니, 문득 무언가 정리해보고 싶고, 의미있는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주억거리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던져놓다시피한 블로그 (www.ourdigital.org)가 생각나 열어보았습니다. 몇 달전에 모종의 설정 오류로 인해 블로그가 열리지 않았던 게 떠오릅니다. 그 때 이후로 한번도 손보질 못했던 겁니다.

반년이 다 되어서야 이 스크립트 오류를 고치고, 플러그인과 서식 설정을 바로 잡고 얕은 한숨을 쉬어봅니다. 이 블로그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정신없이 넘어가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이 빈 공간을 채워나갈 그 무언가를 위해 시간을 나누어 쓰기가 엄두가 안 납니다. 이 숙제 창고 같은 곳은 또 몇 달 드문드문 자조섞인 생각의 파편이 널려있다가 잠잠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루하루 아무 생각없이 흘려보내는 건 아닙니다. 늘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생각을 다듬고 정리해가며, 무뎌지지 않기 위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간간히 올리는 포스팅들은 그 안쓰러운 싸움의 흔적입니다. 그나마도 페이지로 운영을 해보자 한 것조차 몇 달 이상을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미디엄을 개설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습니다. 글을 쓰는 연습을 하자, 조금은 가볍게 읽고 손쉽게 나눠 볼 생각을 담아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시작을 하다보면 ‘쓸모 있는 무엇’을 나눌 수도 있겠지 하는 바램에서 만지작거려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그 무게감은 더해지고 있고, 함부로 말을 보태는 것이 무책임한 것처럼, 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다가오는 한 해에는 ‘글쓰기’에 천착하는 시간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다짐을 해봅니다. 생각을 단단히 만들고, 매끈하게 다듬는데 갈증이 큰 만큼, 그 허기짐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더 절실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말입니다.

[함께 읽기] #12. 한 눈에 보는 기업 디지털 플랫폼 변천사

끊임없이 변해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 속에서, 기업은 고객과 어떻게 고객가치(value proposition)를 소통하고 유의미한 마케팅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이 등장하여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한 축을 차지하기 까지, ‘디지털’은 어떤 의미에서 다루어졌고, 중요한 시사점은 무엇이었는지 한 눈에 보기 좋게 정리해보았습니다.


기업과 브랜드의 관점에서 하나의 도구이기도 했고, 새롭게 맞딱드린 환경이기도 한 ‘디지털’ 영역이 어떤 관점에서 다루어졌는지, 어떤 시사점과 성과를 생각해야 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좌표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정리한 문서이다보니 몇 몇 부분에 있어서는 잘못된 사실도 있고, 의미 해석이 잘 안 맞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로 바로잡아주시면, 성실히 반영하여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의미있는 자료로 발전시켜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함께 읽기] #11. 브랜드 경험 디자인(Brand Experience Design)을 지지하며

몇년 전인가 …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자신이 없기도 했고, ‘경험 디자인’이라고 하면 UX 디자인처럼 디자인 영역에 속하는 ‘유용하고 심미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창조적 활동’으로 여겨질 것 같아 확신이 서지 않았기도 했지요.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라고 하는 것에 대해 재치있고, 위트 넘치게 설명 된 슬라이드를 보고 나니,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오랫동안 추구하고자 하던 방향성을 담은 가장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또렷하게 듭니다.

다른 이의 설명에 힘입은 것이기는 하지만, 고객의 긍정적 경험을 ‘열정적 사랑’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총체적 설계를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라고 정하고, 이 길을 걸어가 보려 합니다.

[함께 읽기] #10. 디지털 마케팅 트렌드 2015 – 10개의 키워드로 읽기

2015년이 시작되며 이러저러한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고, 올 한해를 전망해보는 예측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읽는 일은 늘 어렵고 수 많은 오류의 가능성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지만, 현재를 정리해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이곳 저곳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신호’들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 문서의 내용에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과 문제제기를 기다립니다. 함께 읽고, 물음에 길을 찾으며, 함께 걸어갈 동지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생각하기] #4.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평판과 자아

1413213204_featured.jpeg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World) 속의 ‘나’의 모습은?

사회라는 것 속에 살아가는 이상, 사람은 진짜 나의 모습과는 별도로 다양한 ‘사회적 자아’를 갖게 된다. 그 중에는 내가 바라는 모습에 대한 상도 있고, 누군가에 의해 비춰지는 혹은 해석되는 나의 모습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바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습도 있고, 내가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나의 모습도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모습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습과 면모가 비교적 무난하게 균형을 이루게 되면 그 ‘자아’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과 나의 현재 삶이 괴리를 일으키거나, 중요한 누군가의 기대와 바램이 내 진짜 모습과 갈등을 하거나 하면 그 ‘자아’는 아주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관계망이 발달할 수록 이러한 ‘나의 모습’들의 상태는 한 사람의 정신적-사회적 건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경험하고 있는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는 이러한 건강한 자아의 통합성에 새로운 문제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족’은 더 이상 내가 온전히 속하는 관계의 안전망이 아니다!

이전 시대에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 사회-경제적 안정, 통합된 가치관과 판단의 준거를 제공해주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비교적 안정적인 심리적 울타리를 치고 머물면서 ‘내편’, ‘나를 믿어줄 사람’, ‘나의 실수와 모순도 포용해 줄수 있는 관계’라는 것 안에 의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가족은 여전히 이런 사회-심리적 안전망 연할을 해주고 있을까? 가족 사이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함께 나누고 경험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대화의 빈도와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이 믿고 공감하며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키는 곳은 반드시 가족이 아닐 수도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가족은 그저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동거인’이 되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을 함께 먹는 동안에도 우리는 손안의 기기를 만지작 거리며, 가족의 울타리 바깥의 누군가와 낄낄거리고 사진을 주고 받으며, 댓글을 달고 있다. 아버지의 피곤과 어머니의 갈등은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페이스북 상의 누군가의 힘겨움에는 손쉽게 ‘좋아요’를 누르고 격려의 댓글을 단다. 관계의 의미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고, 서로의 기대감은 어긋나고 상처받기 쉽게 되었다.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이 전지구적으로 확대되고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은, 내가 속하고 싶은 관계를 언제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주었지만, 거꾸로 내가 존재하고 싶은 관계망 속에서도 내가 차지하는 위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형’, ‘누나’, ‘동생’ 등과 같은 관계를 규정하는 단어들의 의미는 여전히 세습되고 유지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 내용적 코드는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속한 가장 기초적인 관계가 흔들리고 훼손되게 되면, 사람은 심각한 ‘자아의 위기’를 겪게 된다. 내가 알고 믿던 나의 모습은 어느 순간 ‘낯설고 알 수 없는’ 타인의 얼굴로 나타는 것만 같다.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중요성을 부여하는 ‘관계’의 망이 달라지게 되면, 내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상도 그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나’라는 모습은 그 관계망 속에 기대되고 비쳐지는 모습을 따라가도록 압력을 받는다.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했던지, 어떤 꿈을 꾸고 있었고 어떤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지… 그것을 증언해줄 사람이 누군인지 자꾸만 혼동된다. 

내 온전한 모습을 투명하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온 역사를 증명해주고, 내 자신의 변화와 지향점, 내가 남긴 것들,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었던지, 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담긴 내 모습은 진짜 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 속에 담긴 순간순간의 내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있을까? 

나의 모습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결과물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비춰진 모습의 조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조합이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다른, 완전히 낯선 타인의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다. 내 삶의 흔적들이 모여 비춰지는 모습인데, 내게는 너무나 낯설기까지 한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평판(reputation)‘은 본래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는 내 모습이다. 그 모습은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생명을 얻고, 때로는 비틀어지고 달라지게 되기도 한다. 나는 끊임없이 그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라지만, 그 바램과 갈증이 커지면 커질 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 요사를 부린다. 평판의 밑그림은 내가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채워가고 완성시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시선과 의미부여’이기 때문이다. 

관계망이 단순하고 비교적 ‘공간적 공유’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평판은 오랜시간 만들어지고, 때때로 수정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오래도록 지속되고 잘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판단을 돕는 과거의 기억이나 일화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평판은 사람의 행동을 제어하고 교정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작고 밀도 높은 사회 속에서의 자아는 끊임없이 평가되고 기록되는 ‘규정된 모습’ 속에 살아가도록 강요받기도 한다. 

외부로 열린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은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평판을 다시 그려낼 수 있다는 바램이 담겨있다.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 지워버리고 싶은 치욕,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 잘 못된 만남이나 다툼의 기억들… 이 모든 무게로부터 탈출하여 온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유혹! 마을을 떠나는 방랑자들은 모두 이러한 바램과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열린 소셜 네트워크는 ‘자유’와 ‘고독’을 함께 가져다 준다. 

무한한 가능성의 네트워크로 열린 외부 세계는 내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 것인가는 온전히 내가 선택적으로 조절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질지, 무엇에 반응을 할지, 어떤 사람들과 공유할지에 대한 선택은 완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 맺어진 사람들에 의해 담겨지는 내 모습은 전혀 내 통제권 안에 있지 않다. 술에 취해 쓰러진 모습, 낮잠을 자다 침 흘리는 모습, 옷을 갈아있다가 엉거주춤 비틀거리는 모습, 우스꽝스러운 모자와 표정 같은 것들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누군가의 앨범 속에 담겨 던져저 버린다. 심지어는 영상으로 고스란히 기록된 추태가 생생하게 공개되고 놀림감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내 자신의 모습은 내 뜻대로 비춰지지 않고, 내 모습에 대한 해석은 다른 이들의 짧은 인상과 감성에 의지하게 된다. 그 모습을 선선히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망에서 벗어나버리는 수 밖에 방도가 없다. 하지만 이 넓디넓은 ‘초연결 사회’에서는 그 어디도 ‘연결’을 끊고 숨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연결 됨’ 조차도 더 이상 온전히 내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 어긋나고 친절하지 못한 ‘시선’ 속에 내 자아는 너무나 힘들고 한 없이 고독하다.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을 누릴 수도 있지만, 도저히 원치않는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기에도 버거운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어떤 모습을 적응해갈 수 있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연결망 속에서 강제로 끊겨버리거나, 혹은 강제로 불려들여져 난폭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OO녀’, ‘OO남’ 같은 별칭은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씹고 던져지는 콘텐츠로 흘러다닌다. 짧은 말 한 마디가 갖는 긍정의 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몇 배나 되는 ‘손쉬운 비난’에 누구나 손쉽게 휩쓸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내 평판은 내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암묵적 동의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게 할 수 있는지, 어떤 것들을 피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잘 조절해야 하는지, 체계적인 방법에 대해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올바른 관계 맺기와 내 모습에 대한 관리 방법이 교육되어야 한다.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대한 가능성과 변화의 혜택 만큼이나, 그 변화가 가져올 위험과 적응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기술의 발전과 혁신이 가져다 줄 장미빛 미래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단지 과거 시대의 유산이나 다름없는 ‘예절 교육’이니 ‘건전한 시민의식’ 같은 관점에서 다뤄져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기술과 네트워크의 이해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의 관리 능력(Digital Literacy)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과 표현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주체적 선택을 돕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그 당연한 조건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신중하게 설계된 교육 체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여기고 담아 둔 사진 한장이 그 아이의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무심한 일상적 행동이 가져올 ‘나비효과’를 생각하면 두렵고 무섭기까지 할 수 있다. 교육과 시스템이 필요한 까닭은 이러한 무지와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을 걷어내고, 안전하고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평판과 자아는 여전히 ‘내 자신의 손’에 담겨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에 대한 선택권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고, 무작정 그 것을 따라가기에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기술과 혁신이 남기는 결과물에 대해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의 지혜‘가 꼭 필요할 것이다! 

[함께 둘러보기] #1. 팀 Apple로 진화해가는 혁신의 현장

애플와치(#AppleWatch)를 두고 엇갈리는 시각이 많아서, 맘 먹고 발표 현장 영상을 다시 둘러봤습니다. 무려 2시간 3분 25초짜리 영상이지만, 행사 영상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 지루하지 않은, 여러가지 소소한 재미와 관전거리가 많은 재미있는 볼 거리였습니다. 

애플이 이뤄온 혁신의 역사를 짚어가며 소개 하는 방식이나, 애플빠들의 컬트적 주문과도 같은 “One more thing…”이 Steve Jobs의 유산처럼 여전히 마술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무대에 오르지 않고 나래이션만으로 존재감을 드리우는 Jonathan Ive가 왜 스티브 잡스의 ‘spiritual partner’라고 불리는지, U2의 연주로 한껏 들뜬 분위기를 매듭짓는 ‘록 콘서트장’ 같은 공간 연출 등등 이 이벤트는 여전히 볼거리 많고, 생각할 거리 많고, 다양한 영감과 들뜬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번 애플의 이벤트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1) 애플이 여전히 혁신의 영감과 열정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과 2) Steve Jobs의 애플이 이제는 ‘팀 애플’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팀웍과 분업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걷는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많은 것을 이뤄낸다는 건 우주의 섭리 같은 진리니까요! :-) 

[함께 생각하기] #2. 밥을 끊고 온 힘을 다해 탄원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IMG_0044.JPG

밥은 생명이다.

스스로 먹는 것을 중단하는 행위는 ‘단호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생명을 지탱하는 배고픔의 욕구를 다스리며, 뜻과 마음의 결을 단단히 세우는 일… 이런 모진 결기가 필요한 삶은 ‘행복을 꿈꾸는 보통사람’의 방식이 아니다.

무엇이 이 행위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가? 양심과 정의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밥을 거를 마음마저 갖게 되었다면, 그 간절함과 겸손한 방식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것일,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들어달라’는 것이다. 돌을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는 방식보다, 겸양되며, 사려깊고, 진심을 다하는 물음이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무너뜨리겠다는 적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바로잡자는 호소 아니겠는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면… 한 국민이 스스로 생명을 담보로 기꺼이 몸을 낮춰 ‘청원’하는 일에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가라는 제도는, 정부라는 기관은, 그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함께 자리를 갖고, 귀기울여 듣고, 방법을 찾기 위한 모색을 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마땅히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그 의무를 저버리는 국가에 대해 항의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또한 ‘시민’의 마땅한 의무이다. 스스로가 통치의 대상인 ‘백성’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이라 믿는다면, 이 ‘최소한의 의무’ 조차 외면하는 ‘국가’에 대해 매를 들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빈 밥그릇을 놓고, 밥을 걸러보는 것이다. 작은 실천이나마 우리 사회의 올곧은 변화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