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생각하기] #4.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평판과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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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World) 속의 ‘나’의 모습은?

사회라는 것 속에 살아가는 이상, 사람은 진짜 나의 모습과는 별도로 다양한 ‘사회적 자아’를 갖게 된다. 그 중에는 내가 바라는 모습에 대한 상도 있고, 누군가에 의해 비춰지는 혹은 해석되는 나의 모습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바램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습도 있고, 내가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나의 모습도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 모습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습과 면모가 비교적 무난하게 균형을 이루게 되면 그 ‘자아’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과 나의 현재 삶이 괴리를 일으키거나, 중요한 누군가의 기대와 바램이 내 진짜 모습과 갈등을 하거나 하면 그 ‘자아’는 아주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관계망이 발달할 수록 이러한 ‘나의 모습’들의 상태는 한 사람의 정신적-사회적 건강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처음 경험하고 있는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는 이러한 건강한 자아의 통합성에 새로운 문제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족’은 더 이상 내가 온전히 속하는 관계의 안전망이 아니다!

이전 시대에는 ‘가족’이라는 단위가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 사회-경제적 안정, 통합된 가치관과 판단의 준거를 제공해주었다. 가족 안에서 우리는 비교적 안정적인 심리적 울타리를 치고 머물면서 ‘내편’, ‘나를 믿어줄 사람’, ‘나의 실수와 모순도 포용해 줄수 있는 관계’라는 것 안에 의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가족은 여전히 이런 사회-심리적 안전망 연할을 해주고 있을까? 가족 사이에서 함께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함께 나누고 경험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대화의 빈도와 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이 믿고 공감하며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키는 곳은 반드시 가족이 아닐 수도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가족은 그저 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동거인’이 되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을 함께 먹는 동안에도 우리는 손안의 기기를 만지작 거리며, 가족의 울타리 바깥의 누군가와 낄낄거리고 사진을 주고 받으며, 댓글을 달고 있다. 아버지의 피곤과 어머니의 갈등은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페이스북 상의 누군가의 힘겨움에는 손쉽게 ‘좋아요’를 누르고 격려의 댓글을 단다. 관계의 의미는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고, 서로의 기대감은 어긋나고 상처받기 쉽게 되었다.

사회적 관계망(Social Network)이 전지구적으로 확대되고 가능성이 열렸다는 사실은, 내가 속하고 싶은 관계를 언제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주었지만, 거꾸로 내가 존재하고 싶은 관계망 속에서도 내가 차지하는 위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형’, ‘누나’, ‘동생’ 등과 같은 관계를 규정하는 단어들의 의미는 여전히 세습되고 유지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 내용적 코드는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속한 가장 기초적인 관계가 흔들리고 훼손되게 되면, 사람은 심각한 ‘자아의 위기’를 겪게 된다. 내가 알고 믿던 나의 모습은 어느 순간 ‘낯설고 알 수 없는’ 타인의 얼굴로 나타는 것만 같다.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중요성을 부여하는 ‘관계’의 망이 달라지게 되면, 내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상도 그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나’라는 모습은 그 관계망 속에 기대되고 비쳐지는 모습을 따라가도록 압력을 받는다.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했던지, 어떤 꿈을 꾸고 있었고 어떤 추억을 만들고 싶었는지… 그것을 증언해줄 사람이 누군인지 자꾸만 혼동된다. 

내 온전한 모습을 투명하게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온 역사를 증명해주고, 내 자신의 변화와 지향점, 내가 남긴 것들, 의미와 가치는 무엇이었던지, 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담긴 내 모습은 진짜 나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스타그램 속에 담긴 순간순간의 내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있을까? 

나의 모습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결과물은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비춰진 모습의 조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조합이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히 다른, 완전히 낯선 타인의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다. 내 삶의 흔적들이 모여 비춰지는 모습인데, 내게는 너무나 낯설기까지 한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평판(reputation)‘은 본래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는 내 모습이다. 그 모습은 누군가의 해석에 의해 생명을 얻고, 때로는 비틀어지고 달라지게 되기도 한다. 나는 끊임없이 그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라지만, 그 바램과 갈증이 커지면 커질 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 요사를 부린다. 평판의 밑그림은 내가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채워가고 완성시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시선과 의미부여’이기 때문이다. 

관계망이 단순하고 비교적 ‘공간적 공유’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평판은 오랜시간 만들어지고, 때때로 수정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오래도록 지속되고 잘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판단을 돕는 과거의 기억이나 일화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평판은 사람의 행동을 제어하고 교정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작고 밀도 높은 사회 속에서의 자아는 끊임없이 평가되고 기록되는 ‘규정된 모습’ 속에 살아가도록 강요받기도 한다. 

외부로 열린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은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평판을 다시 그려낼 수 있다는 바램이 담겨있다.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 지워버리고 싶은 치욕,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 잘 못된 만남이나 다툼의 기억들… 이 모든 무게로부터 탈출하여 온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유혹! 마을을 떠나는 방랑자들은 모두 이러한 바램과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열린 소셜 네트워크는 ‘자유’와 ‘고독’을 함께 가져다 준다. 

무한한 가능성의 네트워크로 열린 외부 세계는 내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 것인가는 온전히 내가 선택적으로 조절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질지, 무엇에 반응을 할지, 어떤 사람들과 공유할지에 대한 선택은 완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 맺어진 사람들에 의해 담겨지는 내 모습은 전혀 내 통제권 안에 있지 않다. 술에 취해 쓰러진 모습, 낮잠을 자다 침 흘리는 모습, 옷을 갈아있다가 엉거주춤 비틀거리는 모습, 우스꽝스러운 모자와 표정 같은 것들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누군가의 앨범 속에 담겨 던져저 버린다. 심지어는 영상으로 고스란히 기록된 추태가 생생하게 공개되고 놀림감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내 자신의 모습은 내 뜻대로 비춰지지 않고, 내 모습에 대한 해석은 다른 이들의 짧은 인상과 감성에 의지하게 된다. 그 모습을 선선히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망에서 벗어나버리는 수 밖에 방도가 없다. 하지만 이 넓디넓은 ‘초연결 사회’에서는 그 어디도 ‘연결’을 끊고 숨어버리기가 쉽지 않다. ‘연결 됨’ 조차도 더 이상 온전히 내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그 어긋나고 친절하지 못한 ‘시선’ 속에 내 자아는 너무나 힘들고 한 없이 고독하다. 무한한 자유의 가능성을 누릴 수도 있지만, 도저히 원치않는 불편한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기에도 버거운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 한번도 이러한 사회 속에서는 어떤 모습을 적응해갈 수 있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연결망 속에서 강제로 끊겨버리거나, 혹은 강제로 불려들여져 난폭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OO녀’, ‘OO남’ 같은 별칭은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씹고 던져지는 콘텐츠로 흘러다닌다. 짧은 말 한 마디가 갖는 긍정의 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몇 배나 되는 ‘손쉬운 비난’에 누구나 손쉽게 휩쓸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내 평판은 내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암묵적 동의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게 할 수 있는지, 어떤 것들을 피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잘 조절해야 하는지, 체계적인 방법에 대해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올바른 관계 맺기와 내 모습에 대한 관리 방법이 교육되어야 한다.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대한 가능성과 변화의 혜택 만큼이나, 그 변화가 가져올 위험과 적응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기술의 발전과 혁신이 가져다 줄 장미빛 미래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도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단지 과거 시대의 유산이나 다름없는 ‘예절 교육’이니 ‘건전한 시민의식’ 같은 관점에서 다뤄져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기술과 네트워크의 이해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의 관리 능력(Digital Literacy)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과 표현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주체적 선택을 돕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 그 당연한 조건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신중하게 설계된 교육 체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라 여기고 담아 둔 사진 한장이 그 아이의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무심한 일상적 행동이 가져올 ‘나비효과’를 생각하면 두렵고 무섭기까지 할 수 있다. 교육과 시스템이 필요한 까닭은 이러한 무지와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을 걷어내고, 안전하고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평판과 자아는 여전히 ‘내 자신의 손’에 담겨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에 대한 선택권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고, 무작정 그 것을 따라가기에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기술과 혁신이 남기는 결과물에 대해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의 지혜‘가 꼭 필요할 것이다! 

[함께 둘러보기] #1. 팀 Apple로 진화해가는 혁신의 현장

애플와치(#AppleWatch)를 두고 엇갈리는 시각이 많아서, 맘 먹고 발표 현장 영상을 다시 둘러봤습니다. 무려 2시간 3분 25초짜리 영상이지만, 행사 영상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 지루하지 않은, 여러가지 소소한 재미와 관전거리가 많은 재미있는 볼 거리였습니다. 

애플이 이뤄온 혁신의 역사를 짚어가며 소개 하는 방식이나, 애플빠들의 컬트적 주문과도 같은 “One more thing…”이 Steve Jobs의 유산처럼 여전히 마술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 무대에 오르지 않고 나래이션만으로 존재감을 드리우는 Jonathan Ive가 왜 스티브 잡스의 ‘spiritual partner’라고 불리는지, U2의 연주로 한껏 들뜬 분위기를 매듭짓는 ‘록 콘서트장’ 같은 공간 연출 등등 이 이벤트는 여전히 볼거리 많고, 생각할 거리 많고, 다양한 영감과 들뜬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번 애플의 이벤트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1) 애플이 여전히 혁신의 영감과 열정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과 2) Steve Jobs의 애플이 이제는 ‘팀 애플’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팀웍과 분업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혼자 걷는 열 걸음보다는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많은 것을 이뤄낸다는 건 우주의 섭리 같은 진리니까요! :-) 

[함께 생각하기] #2. 밥을 끊고 온 힘을 다해 탄원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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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생명이다.

스스로 먹는 것을 중단하는 행위는 ‘단호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생명을 지탱하는 배고픔의 욕구를 다스리며, 뜻과 마음의 결을 단단히 세우는 일… 이런 모진 결기가 필요한 삶은 ‘행복을 꿈꾸는 보통사람’의 방식이 아니다.

무엇이 이 행위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가? 양심과 정의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밥을 거를 마음마저 갖게 되었다면, 그 간절함과 겸손한 방식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온전히 자신의 것일,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들어달라’는 것이다. 돌을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는 방식보다, 겸양되며, 사려깊고, 진심을 다하는 물음이지 않은가? 무엇인가를 무너뜨리겠다는 적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바로잡자는 호소 아니겠는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면… 한 국민이 스스로 생명을 담보로 기꺼이 몸을 낮춰 ‘청원’하는 일에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가라는 제도는, 정부라는 기관은, 그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함께 자리를 갖고, 귀기울여 듣고, 방법을 찾기 위한 모색을 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마땅히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그 의무를 저버리는 국가에 대해 항의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또한 ‘시민’의 마땅한 의무이다. 스스로가 통치의 대상인 ‘백성’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이라 믿는다면, 이 ‘최소한의 의무’ 조차 외면하는 ‘국가’에 대해 매를 들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빈 밥그릇을 놓고, 밥을 걸러보는 것이다. 작은 실천이나마 우리 사회의 올곧은 변화를 소망하며…

[함께 쓰기] #3. Instagram에 날개를 달자 – Iconsquare

[함께 쓰기] #2. Instagram에 날개를 달자 – Iconsquare

Instagram 활동에 대한 다양한 도구를 제공해주던 Statigram 이 Iconsquare(http://iconosquare.com/)라고 이름을 바꾸고, 웹 뷰어와 통계정보 외에 댓글관리, 웹-블로그 연계 서비스(위젯), 콘테스트, 프로모션 지원 등의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Iconsquare Instagram statistics

Iconsquare Instagram 통계 보기

인스타그램 모바일 앱이나 웹 사이트에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지표외에도 자체적으로 산출식을 정한 Love Rate, Talk Rate, Spread Rate 같은 수치를 분석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브랜드 계정을 운영하는 관리자에겐 성과를 가늠해볼 수 있는 요긴한 지수가 될 것 같네요. 

Iconsquare_Instagram statis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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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브랜드나 명사(celebrity)들의 활동정도를 수치화해서 Iconsquare Index라고 제공하고 있습니다. 분야별로 각 브랜드들의 팔로워 수, 인게이지먼트 정도, 해쉬태그 인기도(?), 포스팅 수 등을 기준으로 순위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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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osquare Index: 부문 별 브랜드 순위와 활동성 비교

좀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Facebook 페이지 탭이나 커버 이미지 생성, 웹 사이트나 블로그를 위한 위젯 등을 지원하는 기능이 제공되고 있으며, 

Iconosquare Facebook APIs, Widget, RSS

 

브랜드 계정과 해쉬태그 등을 활용한 사용자 참여형 콘테스트를 지원하는 서비스 등이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인스타그램을 활용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나 커뮤니티 구축을 고려하시는 분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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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쓰기] #2. Getty Images의 WordPress Plug-in

세계 최대의 사진/이미지 서비스인 GettyImages(http://www.gettyimages.com/)에서는 블로그나 웹 사이트에 소스코드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대신, 사진 아래에 GettyImages의 로고, 촬영자/제작자/소유권자의 정보, 해당 소스의 상세 정보 링크를 함께 노출되도록 함으로써, 이미지의 무단 도용과 저작권자 권리 침해를 방지하면서 좀더 자유로운 활용을 가능하게 한 셈이지요.

[예시] WordPress plugin을 통해 short code를 삽입하여 공유하는 이미지

WordPress용 GettyImages 플러그인은 이미지 소스의 유형과 형태 등을 선택사항으로 한 검색기능을 제공함으로서, 원하는 이미지를 손쉽게 찾아 블로그 포스팅 내에 삽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워드프레스용 GettyImages 플러그인 검색창

워드프레스용 GettyImages 플러그인 검색창

워드프레스 편집창 내에서는 단 한줄의 코드로 사진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GeetyImages Plugin for WordPress 편집창

사진을 검색하고, Embed가 가능한지 확인하고, 소스코드를 복사해와서 편집창에 붙여넣고, 미리보기 해서 제대로 이미지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온갖 귀찮은 일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맞은 이미지를 찾아 포스팅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를 얻은 셈이지요 ^^

상세한 정보는 플러그인 제작사 Oomph(http://www.oomphinc.com/)의 WordPress 플러그인 소개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http://www.oomphinc.com/work/getty-images-wordpress-plugin/

[함께 생각하기] #3. 새로운 신뢰관계의 형성과 공유경제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공유경제의 시대>를 진단하는 연재 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WSJ “[공유경제의 시대 1] 대량생산보다 매력적인 개인의 서비스” (http://bit.ly/1pvxTm2)

에어비앤비(#Airbnb https://www.airbnb.com)와 우버(#Uber https://www.uber.com/)의 성공과 기존 경제 시스템과의 충돌로 인한 사회적인 논란이 격화되면서, 이 변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심층적 진단을 하려는 노력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낯선 사람을 태우고, 낯선 사람의 차를 타는 사람들_Uber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저변에는 사람들의 행동 방식이 명백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가 분명히 있습니다. 최근까지 생각날때 마다 메모하고 있는 몇몇 의미있는 발견들을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정보와 뉴스 생산과 중계에 참여하는 데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 소비와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개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이 더욱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 인간관계에 있어서 ‘친밀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사람들에 의해 영향 받는 정보, 생각, 태도의 영역이 커지고 있다.Airbnb의_호스트_평판관리_시스템
  • 일과 생활의 영역, ‘개인적 영역(Privacy)’과 ‘공적인 영역(Public Area)’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그 속에서의 관계와 표현이 뒤섞이는 양상을 보인다.
  • 간접화된 관계가 발달하고 소비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질 수록 피로와 고독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 변화 된 인간관계 방식에 대한 두려움과 부적응을 호소하며, 스마트 기기나 디지털 서비스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 소유가치에 대한 부분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며 ‘사용가치’에 충실하려는 실천을 하는 운동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 밖에도 수 많은 사실들, 발견들, 주목할만한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지만, 이번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연결을 만드는 것에 매우 신속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거대한 조직적 시스템에 대한 의존을, 말을 걸 수 있고 직접 협상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존으로 교체했다. 사람들은 융통성있고 즉각적인 처리 방식에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문법을 발견해가고 있다는 것일까요? 전에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이러한 거래방식과 자원의 공유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의 가치지향적 ‘운동’의 일종일뿐일까요?

[함께 생각하기] #2.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 #LikeAGirl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P&G의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영상을 보면, ‘여성스럽다’, ‘여자같이’ 같은 수식어가 요구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그 이해의 정도 혹은 사회화의 정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역할과 행동, 심리와 생각 같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교육과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끊임없이 요구되고 다듬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남자는 안 그런가? 아마도 남자도 그렇겠지?

[함께 읽기] #8.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사람다움’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집, 가족, 미래 (Home, Family, Future)”의 가치를 역설하며, 평화와 공존을 위해 고뇌하는 지도자 시저(Ceaser)를 지켜보며 무엇이 느껴지는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절대적 명제를 이상으로 걸었던 시저가 혁명을 함께한 코바의 손을 놓아야만 했을 때, 그의 고뇌와 분노, 갈등과 좌절감은 그 깊은 눈빛 보다 어두운 인간 본성의 깊은 바닥을 그대로 비추어준다.

전작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의 ‘깊은 물음’은 언제나 많은 생각을 품게 한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반복해온 피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미움과 분노, 두려움, 편견, 오해, 질투, 잘 못된 판단, 헛된 믿음… 그 모두는 단지 살아 남고(survive), 가족(Family)과 집(Home)을 꾸려, 미래(Future)를 모색해보려는 발버둥 속에서 함께 자라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유인원들이 이룬 새로운 사회와 그들의 미래는 우리 스스로 어쩌지 못했던 오해와 폭력, 지킬 수 없을 것 같은 이상,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행동이 낳는 끔찍한 결말의 아이러니 같은 “피와 고뇌로 점철 된 인간 역사”를 반복한다.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이해와 공존의 방식으로 무리를 이끌려던 시저는 인간이 아닌, 혁명의 동지 코바의 총을 맞고 쓰러진다. 미움과 분노에서 시작된 폭력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가고, 유인원과 인간 무리 속에서 ‘믿음(trust)’과 ‘평화(peace)’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힘 없이 무너져내린다.

시저는 결국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져버리고 이성을 잃은(?) 코바를 죽게 하고, 도시를 차지한 유인원들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며 다가올 인간과의 전쟁을 예고한다. 시저와 함께 평화를 위해 분투했던 인간 말콤과 그의 가족들은, ‘이미 시작된 전쟁’을 눈앞에 두고 서서히 뒤걸음질치듯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시저가 원했던 미래는 아니었지만 유인원들은 인간의 총을 들고 무장을 했고, 스러져가는 인간들은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며 절규한다. 유인원의 시대(the Age of the Apes)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의 전쟁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유인원’의 전쟁은 그렇게 서로 닮아간다. 난간 밖으로 던져진 애쉬는 시저가 천명했던 원칙과 이상을 상기시켰기 때문에 코바에 죽음을 당한다. 코바의 오랜 상처와 분노, 복수심과 광기는 그렇게 또다른 ‘피의 역사’를 시작하게 만든 것이다.

혹성탈출_반격의_서막_@suhcs님의 트윗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나온 어떤 아버지(@suchs 서천석님)의 이 트윗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폭력과 증오와 전쟁을 멈출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아마도 진정한 용기와 인내,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노력만이 이 끔찍한 피의 역사를 멈추게 할수 있을 것이다.